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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고은'이라는 언사(言辭)는 한국 비평계의 거목 김윤식 교수가 쓴 시인 고은에 대한 평문의 제목이다. 고은(본명 고은태) 시인은 1958년 미당 서정주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시, 소설, 평론 등에 걸쳐 무려 140여권의 저서를 간행했다.

이 기록은 한국문학사에 그 유래가 없는 일이다. 50여년에 이르는 그의 문학적 이력은 곧 한국현대문학의 이력이요, 우리 민족문학론의 역사이기도 하다. 지난 해 10월, 유력한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자로 거론되기도 했던 세계적인 시인 고은(高銀)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 고은 연작시집-만인보 제21권
ⓒ 이종암
고은 시인의 연작시집 <만인보> 제21권~제23권이 (주)창비에서 나왔다. '아, 만인보', 만인보(萬人譜)란 말 그대로 시로 옮겨놓은 만 사람의 족보를 뜻한다. <만인보>는 고은 시인이 1980년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수감된 육군교도소 특감에서 기획된 것이라 전해진다. 언제 바깥으로 나갈지 알 수 없는 창살 없는 육군교도소 특별감방에서 시인 고은은 우리 역사속의 만인(萬人)의 삶을 시화(詩化)함으로써 우리의 역사를 올바로 세우고 현재 우리민족이 나아갈 바른 길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첫 작업의 결과가 1986년에 <만인보>1권~3권이 나오게 되었다. 그 후 <만인보>의 작업은 계속 되어 20년 만에 21권~23권이 빛을 보게 되었다.

이번에 나온 연작시집 <만인보> 제21권~제23권은 4·19에서 5·16으로 이어지는 한국현대사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부패한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은 우리 민족이 처음 겪는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그런데 수많은 젊은이들과 이름 없는 시민들이 피를 바쳐 이뤄낸 4·19혁명은 박정희 군부에 의해 도적을 맞게 된다. <만인보> 제21권~제23권에는 혁명의 주축 세력인 학생들과 반대편 부패한 정권 실세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마산 3월의거 한달이 지나간다/세상은 잠 이룰 밤이 없었다/공포였다/불안이었다-(중략)-시체/썩은 시체//송장이다/송장이다/하고 외쳤다//눈에서 뒷머리 쪽으로/20쎈티 쇳토막이 박혀 있었다/하나둘 모였다/하나둘 모였다/어느새/천명이 모였다/살인선거 물리쳐라/시체 인도하라//3월의거가/4월의거로 불붙었다/4월 12일/만명이 모였다/또 만명이 모였다 나아갔다-(중략)-4월 13일 다시 궐기하였다//마산상고 합격자 김주열이/경찰에게 타살된 3월/타살되어/아무도 몰래 물에 던져진 뒤/그 주검/가라앉았다가/그 주검에 매단 돌 풀어져/떠오른 뒤/거기서 4월 혁명은 시작되었다// 하나의 죽음이/혁명의 꼭지에 솟아나/뜨거운 날들이 이어졌다 목이 탔다//이제 마산은 전국 방방곡곡이었다 - '김주열' 부분.

소년은 열여덟살/소년은 부모가 없다/소년은 학생이 아니다/소년은 다니는 공장도 없다 처음부터 빈털터리였다//동대문경찰서 앞에서 즉사/M1소총 총탄이/소년의 빈털터리 생을 뚫었다//누가 찾아가지도 않는 주검//어쩌다 이 세상에 제 이름 하나 붙어 있었다/한정수 - 안정 수 전문.

집에는 홀어머니와 여동생/학교에는 학우들/이만하면/외아들도 외롭지 않다//올해도 여름날 해바라기는 빼곡한 해바라기씨로 무거우리라//경기전기공고 1학년 최기태//서대문 이기붕의 집 앞//부정선거 취소하라/협잡선거 다시 하라/이기붕은 사퇴하라/자유당은 책임져라//이런 구호가 총소리에 묻혔다//경찰은 총 쏘고 깡패는 두들겨팼다/최기태가 끌려갔다/동양극장 안에서/늘어졌다/학우들이 달려왔다/적십자병원으로 업어갔다/집이 사라졌다/학교가 사라졌다/밤 9시 반 호흡이 멈췄다//올해도 인왕산 바위들/여름밤 식지 않고 새벽까지 뜨거우리라
- 최기태 전문.


4월 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의 죽음, 빈털터리 안정수의 죽음, 경기전기공고 1학년 최기태의 죽음 또 일일이 열거 할 수 없는 저 수많은 젊은이와 민초들의 죽음을 마주하면서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만인보> 제21권~제23권은 4월 혁명의 대열에 억울하게 죽어간 넋들을 달래는 진혼곡, 장엄한 레퀴엠이다. 그리고 4월 혁명의 대상인 자유당 이승만-이기붕 정권과 그 하수인들의 삶, 또 4월 혁명을 도적질해간 박정희 군사정권과 그 주구들의 삶을 보면서 분노의 치를 떨었다.

미국 시인 로버트 하스는 이 <만인보>를 두고 "20세기 세계문학 최고의 기획"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고은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책을 펴내는 의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 시대를 올라타고 가는 자보다 그 시대로 하여금 다친 자나 거기에 가뭇없이 몸 바친 자에 대한 문학의 의무를 반영할 것이다. 따라서 죽은 자가 살아나는 문학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점치는 일도 더할 것이다. 진정한 레퀴엠이란 넋을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넋의 침묵을 깨워야 하기 때문이다. 문학이 시간의 패배자일 때 그 시간에의 저항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 문학의 행위이기를 바란다." 그렇다. 문학은 '시간에의 저항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어야 하고, 마땅히 존재해야 할 우리들의 삶과 길의 모습을 언어로 새겨놓는 작업인 것이다.

이제 <만인보> 제21권~제23권은 저 60년대의 시대적 진실을 꿰찬 문학적 '화살'이 되어 세상의 한복판으로 날아왔다. 고은의 <만인보>는 전30권으로 완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미 영어, 스페인어, 스웨덴어 등으로 번역되었으며, 조만간 독일어, 이탈리아어, 불가리아어로도 번역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20세기 세계문학 최고의 기획'을 불려지는 고은의 대형 연작시 <만인보>가 세계 인류의 평화와 생명사상 고취에 크나큰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한다.

만인보 완간 개정판 1.2.3 - 만인보 완간 개정판 전집 1

고은 지음, 창비(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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