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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무원의 섬'이었던 90년 5월 광주 망월동 묘역.
'고립무원의 섬'이었던 90년 5월 광주 망월동 묘역. ⓒ 1990 김당
90년 5월 광주 민가협 모임에 참석한 배은심 여사(고 이한열군의 모친).
90년 5월 광주 민가협 모임에 참석한 배은심 여사(고 이한열군의 모친). ⓒ 1990 오마이뉴스 김당

16년 전 오늘, 그러니까 '광주 5·18, 그후 10년'에 해당하는 90년 5월의 광주는 '고립무원의 섬'이었다.

80년대 내내 응어리진 '광주 문제'의 물꼬를 튼 것은 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에 이은 연세대생 이한열군의 최루탄 피격 사망이 불을 붙인 6월항쟁이었다.

필자의 고교 후배이기도 한 고인의 유족에게는 가슴아픈 얘기이지만, 87년 6월 9일 시위 중 최루탄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은 이한열군이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7월 5일까지 버텼기 때문에 6월 한달 내내 국민적 분노가 이어지고 '넥타이부대'의 동참이 이뤄질 수 있었다.

광주 진흥고를 졸업한 이한열군은 그렇게 6월 한 달을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로 버티다가 전두환 정권의 '6·29 항복선언'과 '7·2 광주문제 해결방안 발표'까지 지켜본 뒤 7월 5일 숨져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되었다.

광주 망월동 5.18 묘역의 이한열-박관현 열사의 묘.
광주 망월동 5.18 묘역의 이한열-박관현 열사의 묘. ⓒ 1990 오마이뉴스 김당

광주의 '고립무원'을 상징한, 아버지 영정사진 든 다섯 살짜리

80년 5월 당시 '망월동 공동묘지'에 묻힌 아버지 조사천씨의 주검 앞에 선 조천호군(당시 5살).
80년 5월 당시 '망월동 공동묘지'에 묻힌 아버지 조사천씨의 주검 앞에 선 조천호군(당시 5살). ⓒ 자료사진
90년 5월 중학생이 되어 10년만에 다시 망월동 묘역의 부친 묘 앞에 선 조천호군.
90년 5월 중학생이 되어 10년만에 다시 망월동 묘역의 부친 묘 앞에 선 조천호군. ⓒ 1990 오마이뉴스 김당
80년 5월 당시 광주 상무대에 즐비한 희생자들의 관 앞에서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든 다섯 살 꼬마 조천호씨(31·광주시청 근무) 표정은 광주의 '고립무원'을 상징하는 사진이다. 조씨는 80년 5월 21일 금남로 시위에 나섰다가 총탄에 맞아 숨진 조사천씨(당시 34세) 2남1녀 중 장남이다.

외신기자 카메라에 잡혀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던 조씨가 정작 자신이 찍힌 화제의 사진을 처음 본 것은 6·29선언 이후였다. 87년 9월 당시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장용주 신부)가 은폐된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흩어져 있던 사진자료를 모아 광주민중항쟁 기록사진집 <오월광주>를 펴낸 덕분이었다.

(바로 그 사진집 덕분에 필자는 90년 5월에 '광주 그후 10년'을 취재하면서 조씨를 수소문해 그의 어머니와 함께 만나 그를 다시 망월동 묘역에서 카메라 앞에 세웠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조씨는 그후 98년 광주시립묘지 관리인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가 '5·18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해 보훈처가 관리를 맡게 되자 광주시청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88년 여소야대 정국, 90년 1월 '3당합당'으로 다시 '호남 고립화'

6월항쟁으로 위기에 몰린 민정당 정권은 6·29 선언에 이어 7월 2일에는 위령탑 건립, 정부의 유감 표명, 유족에 대한 보훈연금 수혜, 특별법 제정 보상 등을 골자로 한 이른바 광주문제 해결 방안을 발표했다. 이어 7월 9일에는 김대중(DJ) 내란음모 사건 관련 18명과 광주사태 관련 17명 등 시국사범 2335명에 대한 사면복권이 단행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80년 5월 광주 이후 7년만에 조성된 민주정부 수립의 기회는 야당 분열과 후보 단일화 실패로 놓치고 만다. 노태우 정부는 88년 출범 직후 '민주화합추진위원회'를 출범시켰고 민화위는 '광주사태'를 '광주민주화운동' 및 '광주 학생과 시민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규정했다.

민정당은 대선에서 야권 분열의 '어부지리'로 승리했지만 총선 민심은 민정당이 의회까지 장악하는 것은 거부했다. 민정당은 88년 4·26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 획득에 실패했다. 이로써 제1야당인 평화민주당(김대중 총재)과 통일민주당(김영삼 총재) 그리고 신민주공화당(김종필 총재)의 야3당이 의회를 지배하는 '여소야대' 정국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YS)·김종필(JP) 총재는 90년 1월 이른바 '3당합당'을 단행해 거대여당 민자당을 탄생시켰다. 그것은 총선 민의에 대한 배반이자 '민화위'를 내세운 광주와의 화해 손길이 위선임을 확인시켜준 역사의 후퇴였다.

3당합당 지역연합, 호남 포위는 '정치의 탈을 쓴 5·18'

90년 5월 당시 '오월광주' 사진전을 준비중인 광주 가톨릭 정평위 장용주 신부와 김양래 간사.
90년 5월 당시 '오월광주' 사진전을 준비중인 광주 가톨릭 정평위 장용주 신부와 김양래 간사. ⓒ 오마이뉴스 김당
최근 박희태 국회부의장과 6공 시절 권력 핵심이었던 박철언 전 의원의 회고록에 따르면, 노태우 대통령은 먼저 제1야당이었던 김대중 평민당 총재에게 합당 제의를 했으나, DJ는 "야당으로서 국민의 심판을 받아 집권을 하고 싶다"며 이를 거절했다.

이에 민정당은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추진했고 그 과정에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에게 40억원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40억원의 성격과 관련 박 전 의원은 방송 인터뷰에서 "여소야대 상황에서 광주문제 마무리, 5공청산, 내각제를 통한 정계개편을 위해 YS의 협력이 긴요했고, YS도 정치자금이 필요해 (합당) 분위기 조성을 위한 자금으로 제공된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노태우 대통령이 여소야대 상황에서 '광주 문제 마무리'에 협조해주는 대가로 YS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 40억원의 일부는 광주에서 흘린 피의 보상에 협조하는 조건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90년 1월 합당으로 몸을 부풀린 거대여당 민자당은 그해 7월 국가배상을 요구하는 평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광주피해자보상법을 제정해 '날치기' 통과시켰다.

대구·경북(TK)을 기반으로 한 민정당과 부산·경남(PK)을 기반으로 한 통일민주당 그리고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신민주공화당의 야합 결과물인 '거대여당 민자당'의 출현은 호남 민중에게는 '정치폭력'이었다. 그것은 호남지역을 기반으로 평민당을 제외한 모든 정치세력이 지역적으로 호남을 포위하는 '호남 고립화전략'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정치의 탈을 쓴 5·18'의 악몽이었다.

3당합당 반대한 노무현, 호남 민중의 '동지'로 각인

고립화된 광주 시민들에게 김영삼-노태우-김종필의 3당합당은 제2의 '정치적 5.18'이었다.
고립화된 광주 시민들에게 김영삼-노태우-김종필의 3당합당은 제2의 '정치적 5.18'이었다. ⓒ 1990 오마이뉴스 김당
광주 학생들은 3당합당으로 다시 '민자당 해체' 투쟁에 나서야 했다.
광주 학생들은 3당합당으로 다시 '민자당 해체' 투쟁에 나서야 했다. ⓒ 1990 오마이뉴스 김당
DJ의 민주화투쟁 동지이자 경쟁자였던 YS는 3당합당을 '구국의 결단'이라고 미화했지만, 그것은 호남민중들에게 한편으로 '화해의 손'을 내밀면서 뒤통수를 후려친 격이었다. 80년 5월 영남 군벌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의 피비린내나는 폭압 속에 외부와 단절된 고립무원의 극한적인 공포를 경험한 광주는 10년만에 다시 '고립무원의 섬'이 되었다.

광주의 학생들은 이번에는 '민자당 해체'를 주장했다. 그때 '고립무원의 섬'이었던 광주의 아픔을 이해한 유일한 영남권 정치인은 노무현 의원이었다. 처음에는 최형우 의원도 '타도 대상이었던 민정당과 당을 합칠 순 없다'며 YS와의 결별까지도 선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 YS 뒤를 따랐다. 그때 노무현 의원이 3당합당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자 '노무현이 잡아오라'는 YS 지시로 불려온 노 의원 면상에 최형우가 주먹을 날렸다는 무협담도 있다.

아무튼 90년 1월 30일 3당합당을 위해 통일민주당 해체식을 하던 날, 사회를 본 김영삼 총재가 "해체에 이의 없습니까?"라고 묻자 거의 모든 참석자들이 박수를 치며 "이의 없습니다"라고 연호했다. 그때 겁없던 초선 의원 노무현은 김상현 의원과 함께 분연히 일어나 "이의 있습니다"라고 의사진행 발언을 신청했다. YS는 이를 애써 못 본 척하고 "그럼 이의가 없는 것으로 통과되었음을 선포합니다"라고 해산을 선포했으나, 노무현은 손을 번쩍 들며 "전 반대합니다"라고 외쳤다.

한때 야당의 민주투사였던 이인제 의원 등 다른 동지들마저 비웃는 가운데 혼자서 반대를 외친 이 모습은 호남 민중에게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그것은 똑같이 '고립무원의 섬'에 갇힌 사람들의 동병상련이자 동지애였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광주가 '노풍'(盧風)의 진원지가 된 것은 바로 그때 강렬하게 각인된 '동지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민주당은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전통을 가진 민주정당"

90년 1월 3당합당 반대를 외친 초선의원 노무현은 '고립무원'의 호남 민중에게 '동지'로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90년 1월 3당합당 반대를 외친 초선의원 노무현은 '고립무원'의 호남 민중에게 '동지'로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그 뒤 2002년 2월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노무현 민주당 상임고문은 "후보의 정책과 노선, 역사성과 정통성의 문제는 반드시 검증해야 할 문제"라며 당시만 해도 절대 우위를 보였던 이인제 후보의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공격했다.

당시 '말은 바꿀 수 있어도, 걸어온 길은 바꿀 수 없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노무현 후보 홈페이지에 인터뷰 형식으로 밝힌 글인데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므로 길게 인용한다.

"3당합당 때 야당하다 여당 간 것이 무슨 도덕성과 관계 있냐고 이렇게 우기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3당합당 그 일 이후로 금배지만 달아주면 이당 저당 돌아다녀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런 정치풍토가 만들어졌습니다. 그야말로 청운의 꿈을 안고 국회의원 되겠다고 공천 신청하는 사람이 동시에 이당 저당,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사람들이 신청서를 내는 퇴폐적인 정치문화가 이루어지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3당합당입니다. 3당합당 이후 정권을 잡는 과정이 우리 정치를 이렇게 타락시킨 것입니다.

민주당은 반독재민주화운동의 빛나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 역사성 있는 민주정당입니다. 분명 개혁지향의 정당이고 중산층과 서민의 당, 국민통합, 남북화해와 협력 등 이런 훌륭한 노선을 가진 민주정당입니다. 이런 민주정당의 지도자는 그에 맞는 정치경력을 가져야 합니다. 한나라당 후보로서 경쟁에 떨어졌던 사람이 어찌어찌 해서 민주당에 와서 후보가 되어버리면, 이번 대선은 지난번 낙방자와 우승자의 경쟁이 되는 것 아닙니까?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은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3당합당 때 안 따라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몇 번 낙선을 좌절을 맛보며 견디고 민주당을 지켜왔습니다. 이것을 통해 저는 동서화합을 이루고자 온갖 희생을 감수해왔습니다. 저는 영남사람이지만 민주당이 바로 민주정당이고 국민통합 정당이기에 민주당을 지키기 위해 고통스런 정치를 견뎌 왔습니다."


문재인 '부산 정권' 발언은 "우리가 남이가" 2006년식 버전?

"대통령도 부산 출신인데 부산시민들이 왜 부산정권으로 안 받아들이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발언에 최근 논란을 불러일으킨 문재인 전 청와대 수석.
"대통령도 부산 출신인데 부산시민들이 왜 부산정권으로 안 받아들이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발언에 최근 논란을 불러일으킨 문재인 전 청와대 수석.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이제 다시 그로부터 4년이 흘렀다. 노무현 후보는 광주 시민의 '전략적 투표'와 '절대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17대 대통령이 되어 임기 후반기에 이르렀다. 광주를 정치적으로 포위해 고립화시킨 3당합당으로부터는 16년이 지났다. 그리고 광주를 군(軍)으로 포위해 총칼로 폭력을 행사한 그해 5월로부터 26년이 지났다.

그리고 이제는 '반독재민주화운동의 빛나는 전통을 가지고 있는 역사성 있는 민주정당'이었으나 '잔민당'으로 전락한 민주당과 '국민참여경선'을 핵심으로 한 정치개혁을 명분삼아 민주당을 분당했으면서 다시 통합을 외치는 열린우리당이 광주에 와서 서로 '5월 정신의 계승자'임을 내세우는 낯 뜨거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또 3당 합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민자당의 후신인 한나라당 지도부조차도 광주 5·18 국립묘지를 찾아 5월 정신을 기리고 한표를 호소한다.

그러니 광주 시민들은 지금 이 '낯 두꺼운' 정치인들을 앞에 두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만도 하다. 하긴 강준만 교수(전북대)는 최근 <한겨레21>에 쓴 글에서 정치인의 제1자질을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코드로 해석한 바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김영삼부터 살펴보자. 3당 합당과 내각제 각서 파동은 김영삼의 탁월한 후안무치 능력을 보여주었다. 정계은퇴 식언과 '20억+알파' 사건은 김대중의 후안무치 능력을, 대선후보 전 동교동계에 대한 우호적 태도와 지역주의 양비론의 일시적 위장 등은 노무현의 후안무치 능력을 입증해준다."

그런데 강준만의 '후안무치 사전'에는 문재인 전 민정수석이 추가되어야 할 것 같다. 그의 '부산 정권' 발언은 3당합당 이후 92년 대선 당시 초원복집에서의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되면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의 '2006년식 버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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