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선양(심양) 주재 한국총영사관에 체류 중이던 탈북자(새터민) 4명이 중국인 직원들에게 폭행을 가한 후에 바로 옆에 있는 미국총영사관으로 월담하는 사건이 벌어져 한·중·미 3국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이번 사건을 처리하기 힘든 요인 중 하나는, 이들이 중국인들을 폭행한 후에 미국총영사관에 진입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생기는 국제법적 쟁점은, 중국 실정법을 위반하고 미국총영사관에 진입한 사람의 신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들이 월담 시 중국인을 폭행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겠지만, 중국인들을 폭행하고 월담한 이상 중국 실정법 위반 사실이 중요한 쟁점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중국 실정법을 위반했으므로 중국정부가 이들의 신병을 확보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들이 현재 미국총영사관 내에 있으므로 미국정부가 신병을 확보해야 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다. 이것은 소위 공관(公館)의 비호권(庇護權)과 관련된 문제다.
페루 법률을 위반하고 콜롬비아대사관에 망명한 토레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검토해 볼 만한 전례가 있다. 1948년 페루 혁명가 토레(Torre)가 페루 주재 콜롬비아 대사관에 진입함으로써 페루와 콜롬비아 간에 국제분쟁이 생긴 적이 있다.
이 사건은 선양 사건과 달리 영사관이 아닌 대사관에서 벌어진 사건이지만, 선양 사건과 유사한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검토해 볼 만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페루의 실정법을 위반하고 콜롬비아 대사관에 진입한 토레를 놓고서 양국이 서로 신병을 확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중국 실정법을 위반하고 미국총영사관에 진입한 탈북자 4명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토레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범죄자’가 아니었겠지만, 페루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실패한 혁명가’인 토레는 분명 페루 실정법을 위반한 ‘범법자’였다.
그런데 콜롬비아정부는 페루를 두둔하면서 페루정부를 상대로 “토레를 콜롬비아로 망명시킬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른 바 안도권(安導券)을 요구한 것이다. 토레의 신병은 콜롬비아대사관 안에 있지만, 토레를 콜롬비아로 데려가려면 페루정부의 동의를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페루정부가 이를 거절하자, 콜롬비아정부는 국제사법법원(ICJ)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때 ICJ가 보인 모호한 태도다. 이 사건은 한 번에 끝나지 않고 재판을 두 차례나 거치고서야 끝났다. ICJ는 두 번의 판결을 통해 그야말로 ‘모호한 태도’로 일관했다.
ICJ는 모호한 판결로 일관
첫 번째 판결(1950년)에서 ICJ는 “토레에 대한 콜롬비아대사관의 비호는 종료되어야 한다”고 판시했다. 콜롬비아대사관이 토레를 계속 비호하는 것은 위법하다는 입장을 보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토레의 신병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분명 페루정부의 손을 들어준 것 같지만, 그렇다고 토레의 신병을 페루정부에게 넘기라는 말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판결을 기초로 페루정부가 콜롬비아를 상대로 토레의 신병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자, 콜롬비아는 이를 거부하면서 ICJ에게 새로운 재판을 청구했다. 그러자 ICJ는 또다시 다음과 같은 모호한 판결을 내렸다.
“토레는 정치범이 아니므로 콜롬비아는 토레를 인도할 의무는 없다. 인도(引渡)만이 비호를 종료시키는 방법이 아니므로, 어떤 방법으로 비호 상태를 종료시킬 것인가의 문제는 당사국들이 국제예양과 친선을 바탕으로 해결하라”
두 번째 판결(1951년)의 핵심은, 콜롬비아대사관이 토레에 대한 비호를 어떻게 종결시킬 것인가를 놓고 양국이 협상으로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두 차례의 판결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콜롬비아대사관은 토레에 대한 비호를 종료하라(토레를 대사관 밖으로 내보내라) ▲그러나 그 방법에 관하여는 당사국들이 협상으로 잘 해결하라. 다시 말하면, 콜롬비아정부가 토레를 비호하는 것은 위법하지만, 그렇다고 콜롬비아정부가 토레의 신병을 페루정부에게 인도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ICJ가 이런 모호한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ICJ가 특정 국가의 편을 들 경우에 다른 국가가 판결 집행을 거부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명확한 판결을 내렸다가 어느 한쪽의 원성을 듣기보다는, 모호한 판결을 내려 ICJ의 권위를 살리는 편을 택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사국들끼리 잘 해결해 보라는 ‘무책임한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이번 선양 사건의 경우에도 현실적으로 중·미 양국이 협상을 통해 해결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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