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 정약용 VS 장군 고선지’
둘의 공통점은 무얼까? 실학의 집대성자로서 조선의 대표적 문인이던 정약용과 고구려 유민으로 아득한 시절 당나라의 서역 정벌을 지휘했던 무인 고선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사람은, 그렇다. 바로 한 여성작가에 의해 소설로 조명된 바 있는 인물들이다.
지난 1992년 출판돼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며 지금까지 3백 만권이 넘게 팔린 밀리언셀러 <소설 목민심서>와 ‘전남일보’에 인기리에 연재되며, 지난 1996년 출판된 <돈황의 불빛>이 그것.
우연한 기회였다. 이삿짐을 정리하다 잊힌 첫사랑의 사진을 발견하듯, 서류를 찾다 책장 머리에 꽂힌 <돈황의 불빛>을 접하게 된 건. 다시 소설을 읽었고 책장을 덮었을 때 자연스럽게 황인경이라는 작가가 떠오르며 그녀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외도? 좋은 글을 쓰기 위한 한 과정일 뿐”
궁금증을 풀기 위해 황 작가를 찾아간 곳은 책 먼지가 들썩이는 작업실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서울 강남에 자리 잡은 말끔한 호텔의 사무실이었다. 1996년 <돈황의 불빛>을 마지막으로 작품 활동을 중단한 황인경.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작가 말고도 호텔 웨딩컨설팅 사업부의 부사장, 오케스트라 감사, 교회 집사 등 여러 개의 직함이 생겼다.
웨딩컨설팅 사업부를 총괄하고, 오케스트라를 꾸리고, 신앙생활에 집중하며 외도를 해 온 그녀. 하지만 예비 신랑신부들의 사랑을 돕고, 음악을 접하고, 마음의 평안을 꿈꿔서일까? 50대 초반에 들어섰음에도 그녀의 모습은 <소설 목민심서>에 새겨진 14년 전 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생기가 넘쳐났다.
<소설 목민심서>를 구상하고 집필한 기간이 7년, <돈황의 불빛>을 신문에 연재하고 출판하는데 2년이 걸렸으니 어찌 보면 황 작가에게 10년은 그리 길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궁금했다. 혹 이제 작가라는 본업을 등한시하는 것은 아닌지.
황 작가는 그 동안 ‘잠시’ 쉬고 있었을 뿐, 작품 활동을 그만둔 것은 ‘절대’ 아니라며 이 모든 활동이 궁극적으로는 작품에 영향을 미칠 과정이라는 진단을 빼 놓지 않았다.
“새로운 작품을 구상 중인데 조만간 집필에 들어갈 거예요. 민감한 내용이라 자세히 말씀 드릴 수는 없지만요. 가슴을 울리는 작품을 쓰고 싶은 건 작가의 욕심 아닐 까요. 예비 신랑 신부들의 사랑을 돕는 일은 즐거워요(웃음). 음악도 그렇고요. 소설이나 음악이나 종교나 사람들에게 위로와 위안을 준다는 점에선 한길을 간다고 할 수 있죠.”
글 쓴다는 것은 발가벗겨 진다는 것을 깨달은 어린 시절
문득 작가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궁금해졌다. 그러자 그녀는 자못 심각하게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렸다.
“사생대회 때 무역업을 하시던 부모님이 일본으로 출장을 떠나시는 바람에 혼자 갔었어요. 그래서 서운한 마음을 솔직하게 글로 표현했는데 조회 시간에 교장선생님께서 잘 썼다며 제 글을 전교생 앞에서 읽으시는 거예요. 그 때 어찌나 부끄럽던지… 글을 쓰는 게 이렇게 ‘발가벗겨 지는 거구나’ 하는 생각에 다시는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죠.”
황 작가는 당시의 아련한 추억이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도록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님들이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 좋은 글을 한 번 써 보자’며 내민 갖은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스스로’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스물한 살에 결혼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데 아이들에게 읽어 줄 책이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대로 된 책을 한 번 써 보자며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제 나이 스물아홉이었죠.”
이후 그녀는 다른 작가들이 쉽게 다루지 못했던 정약용과, 관련 자료조차 찾기 힘든 고선지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어찌 보면 역사 소설에 집중했다고 할 수 있는데 여성의 입장에서나 많은 작품을 쓰지 않은 작가의 입장에서나 특별한 이유가 있을 법 하다.
“다산은 누구도 다루지 않았어요. 특히 그는 한 분야에 머무르지 않고 음악, 미술, 천문학, 역학 등 다방면에 박식해서 대중적인 이야기로 풀 수 있겠다 싶었죠. 하지만 문인이다 보니 활동성이 좀 떨어지는 점이 있었죠. 그래서 찾은 게 고구려 유민이던 고선지 장군이에요. 자료가 별로 없어 애를 먹었죠. 제대로 조명하지 못한 것 같아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싶어요. 하지만 남성적인 모습을 부각시킨 점은 만족해요.”
그녀는 현재 서른한 살과 스물여덟 살인 아들 둘을 둔 어머니다. 작가, 부사장, 집사에 어머니와 아내에 이르는 다양한 역할 중 어느 직함에 가장 애착이 가느냐고 묻자 여전히 “황 작가라 불리는 게 제일 좋다”며 배시시 웃는다. 하지만 현재의 생활은 작가 활동을 하기에는 책 볼 시간도 없이 너무 바쁜 게 아닐까. 그녀는 “오히려 닮지 않으려고 많이 읽는다”며 문학에의 끈을 놓고 있지 않음을 밝혔다.
‘잡가’ 아닌 ‘작가’로 남고 싶었다
다음 작품을 구상 중이라는 황 작가는 이야기나 사건의 전개 보단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글을 쓰는 것에 대한 경향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작품이라는 게 시대를 반영하니까 한편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것이 대세라고 해도 따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흐르면 지금의 틀을 깨고 껍질을 벗지 않겠나 싶어요. 작품의 추세가 맞고 안 맞고를 떠나 폄하할 필요는 없지만 작품이라는 건 무언가 남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읽고 나서 우울하고 속상한 것 보단 희망을 주는 게 좋다고 개인적으로 믿습니다(웃음).”
황 작가는 옷도 유행을 따라가지 않으려고 한단다. 그래서 지금도 옷장을 보면 십 수 년 된 옷들이 많다고. 책 읽기도 글쓰기도 옷 입기도 자신의 생각대로 고수하는 모습에서 외모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강인함이 전해졌다. 그렇지만 <소설 목민심서>가 소위 빅히트를 친 후, 아르바이트생이 밤새워 ‘인지’ 도장을 찍던 당시에도 그녀의 생각을 고수할 수 있었을까?
“청와대 부대변인을 맡아 달라, TV사회를 봐라, CF를 찍자, 대학 전임으로 와라, 잡지 머리말을 써 달라 등 정말 제안이 많았죠(웃음). 하지만 저는 그때 그때 그들의 기호에 맞게 쓰이는 ‘잡가’는 되고 싶지 않았어요. 저를 알고 싶다면 제 작품으로만 만족하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저는 ‘작가’이고 싶거든요.”
그녀는 요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연필을 사 놓았다고 한다. 또 다시 외도냐고 묻자, 글을 쓰기 위한 그림이라며 활짝 웃었다.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함이라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잠을 못 이룬다며 황 작가는 부드럽고 푸근한 표정을 보였다. .
그런 그녀가 구상하는 다른 이야기는 무엇일까? “죄송하다”며 입을 다무는 그녀의 모습이 다음 작품을 더욱 기다리게 만든다. 어쩌면 참을 수 없는 즐거운 궁금증이 될는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