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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가 내외명부의 여성들을 거느리고 잠실에 행차하여 함께 뽕을 따는 의식인 ‘친잠례’(왼쪽)와 국의를 입은 왕비.
왕비가 내외명부의 여성들을 거느리고 잠실에 행차하여 함께 뽕을 따는 의식인 ‘친잠례’(왼쪽)와 국의를 입은 왕비. ⓒ 글로브인터렉티브(주)
"궁녀는 궁중 문화를 만든 장본인"

'e-조선궁중여성'은 <경국대전> <가례도감> <친잠의궤> 등의 문헌을 바탕으로, 궁중 안에서 이뤄지는 공식활동, 정치활동, 여가생활 등을 왕비, 후궁, 궁녀 등으로 구분해 자세히 설명한다. 또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5대 궁궐에 남아 있는 여성들의 생활공간 자료들도 참고할 만하다.

콘텐츠는 남성 중심의 정치와 문화가 행해진 공간으로만 인식됐던 '궁중'의 모습을 여성의 시각에서 재조명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더불어 그 동안 주목 받지 못했던 궁녀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은 콘텐츠가 주는 또 다른 선물이지 싶다.

글로브인터렉티브 최희경 대표이사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한류열풍을 이끈 드라마 <대장금>을 예로 들며 말문을 열었다.

왕비, 후궁, 궁녀 등 다양한 계층의 궁중여성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대장금>은, 드라마 초반 궁녀 선발과정이 재미나게 그려지고 이후 궁녀들의 생활상이 자세하게 묘사되면서 흥미를 끌었다. 최 대표는 궁중여성의 삶 중에서 특히 장금이와 같은 '궁녀의 역할'을 강조했다.

"궁중에서 자수, 복식, 음식 등을 만든 사람들이 누구죠? 궁녀들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궁중 문화를 논할 때, 궁중과 왕실의 문화를 만든 장본인인 궁녀들은 쏙 빼 버려요. 천한 신분일 거라는 잘못된 인식 때문인데, 궁녀는 다양한 직업으로 구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직여성이었어요."

스무 개가 넘는 직급으로 이뤄진 궁녀들은 어린 나이 궁궐에 들어 와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왕'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왕비와 후궁들 사이에 끼여, 이성과의 사랑엔 담을 쌓고 동성애를 나누기도 하고, 내시와 눈이 맞기도 했다. 죽기 전에는 반드시 궁궐 밖으로 나가야 하는 서러운 운명을 지니기도 했다.

하지만 궁녀들은 개인재산을 가질 수 있었으며, 관리자에 해당하는 상궁은 시중을 드는 궁녀를 두기도 했다. 이처럼 전문공무원 성격이던 궁녀는 조선후기 500~600명을 헤아렸는데, 중앙 정부의 문반과 무반을 합한 전체 정원이 채 5000명을 넘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신분상승의 꿈을 실현하는 '여성리더십' 긍정 평가해야

최 대표는 "남성 중심의 정치문화가 판을 쳤던 당시 궁궐에서, 여성으로서 여성을 관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까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여성리더십'이 떠오른다"며 "궁궐 내 신분상승의 꿈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수백 명의 궁녀들을 다스렸던 상궁 등 중간관리자의 '여성리더십'이 긍정적으로 해석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 대표가 주장한 여성리더십은 후궁들의 삶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왕자를 생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던 후궁은 간택된 경우와 궁녀 출신으로 나뉜다. 조선초기에는 왕비와 마찬가지로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간택을 거쳐 후궁들을 선발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간택은 점차 사라지고, 그 대신 2차까지 왕비간택에 선발되었다가 최종 3차 간택에서 탈락한 2명의 여성들을 후궁으로 삼았다.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는 왕자를 얻기 위해 애초부터 간택된 경우인데, 이러한 후궁의 가문은 왕비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당대의 권력 있는 세도가들이었다. 조선 초기 성종 때의 제헌왕후 윤씨(연산군의 생모)나 그 뒤를 이은 정현왕후 윤씨 등은 모두 명문가 출신으로 후궁에서 왕비가 된 경우였다.

하지만 왕의 사랑을 받아 함께 잠을 잔 후궁이 자녀를 낳지 못했을 때는 특별상궁의 지위에 머물렀다. 이들 중에는 왕들의 측근에서 높게는 제조상궁(提調尙宮-종일품이나 이품의 벼슬)이나 지밀상궁(至密尙宮-왕과 왕비의 침실을 살피던 벼슬)으로서 권력을 쥐기도 하였다.

후궁 중에는 왕자녀를 낳고 내명부의 직첩(조정에서 내리는 임명 사령서)을 받아 권세를 흔든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연산군대의 장녹수, 광해군대의 김개시, 숙종대의 장희빈은 왕의 후궁으로서 정치에 깊이 간여한 인물들이다.

권력의 최정점에 오르며 새로운 여성리더십을 보인 장녹수

최 대표는 "후궁들을 정치를 뒤흔든 부정적인 인물로만 보지 말았으면 한다"며 "여성리더십의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름난 후궁들은 대개 정치를 말아 먹었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요. 하지만 신분개척의 입장에서 보면, 종의 신분에서 후궁의 자리까지 오른 장녹수 등에 대한 새로운 평가도 가능해요. 여성의 신분으로 권력의 최정점까지 올랐다는 것은 새로운 의미의 여성리더십으로 평가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정권 다툼에서 밀려나지만 않았다면 말이죠."

한편 자식을 낳지 못하고 과부가 된 후궁들은 여승이 되었다고 한다. 수절을 하기 위해, 죽은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스님이 되었다는 것. 왕족에게 시집갔다가 청상과부가 된 여성들도 스님이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조선 초기 과부 후궁들이 머리를 깎고 모여 있던 절이 '정업원'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잠업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전국에 잠실(蠶室)을 두었다. 한양에도 동잠실, 서잠실 등 몇 군데에 잠실을 두어 누에를 치도록 하였다. 왕비가 내외명부의 여성들을 거느리고 잠실에 행차하여 함께 뽕을 따는 의식인 '친잠례'는 주로 경복궁과 창덕궁의 후원에 설치한 내잠실에서 행하였다.

친잠례는 영조대에 편찬된 <친잠의궤(親蠶儀軌)>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는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 서씨가 경복궁 터에서 행한 친잠을 정리한 것이다. 친잠례를 행할 때 왕비는 황색의 국의(菊衣)를 입고 누에의 신인 선잠(先蠶)에게 제사를 올렸다. 선잠에 올리는 제사는 중사 규모로 종묘, 사직 등 국가의 정통성 다음으로 중요했다(국가제사는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의 세 종류로 나뉘는데, 대사는 종묘, 영녕전, 사직에 지내는 제사만이 해당).

창덕궁 낙선재, 생활과 정치가 결합된 살아 있는 공간으로 해석

'e-조선궁중여성'은 궁궐을 여성들의 생활과 정치가 결합된 살아 있는 공간으로 재해석했다. 창덕궁 낙선재 자료.
'e-조선궁중여성'은 궁궐을 여성들의 생활과 정치가 결합된 살아 있는 공간으로 재해석했다. 창덕궁 낙선재 자료. ⓒ 글로브인터렉티브(주)
'e-조선궁중여성'은 왕을 중심으로 정치가 논의되던 외명부(外命婦 - 왕족 및 문무관(文武官)의 품계에 따라 아내에게 내리던 봉작(封爵))가 아니라, 왕비를 중심으로 나라 살림을 꾸리던 내명부(內命婦 - 빈(嬪)·귀인(貴人)·소의(昭儀)·숙의(淑儀) 등을 일컫는 여성관직)에 주목, 왕비와 후궁, 궁녀의 삶을 다양하게 조명했다.

최 대표는 "태어나면서 리더십에 익숙한 남성과는 달리, 순수한 목적과 열정으로 권력을 지향한 여성들의 리더십에 주목해야 한다"며 "창덕궁 낙선재 등 궁궐을 여성들의 생활과 정치가 결합된 살아 있는 공간으로 재해석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이어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 등 명성황후와는 또 다른 삶을 살다 간 황실여성의 삶도 재조명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왕자 출산을 둘러싸고 권력 다툼을 벌였던 궁중 여성들. 그 동안 왕비와 후궁, 궁녀는 다분히 부정적인 이미지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 이면엔 전문직여성으로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던 수 많은 궁녀들이 있었고, 나라 살림을 보살피던 후궁과 왕비들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정치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여성들이 양념 역할로, 얼굴 마담으로 총리와 대표와 후보를 맡고 있는 것은 아닐 터. 현실 정치의 영향력을 봤을 때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조선궁중여성들의 생활 속에 숨겨진 리더십과 역할을 되돌아보는 것은, 21세기 여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 분명 의미가 있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글로브인터렉티브㈜ ‘e-조선궁중여성’ 콘텐츠 자료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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