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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a77a2>우리 가족, 투표했어요... 민주주의에 대한 '산 교육'을 위해 아내가 예림이와 함께 기표하고 있다.
우리 가족, 투표했어요... 민주주의에 대한 '산 교육'을 위해 아내가 예림이와 함께 기표하고 있다. ⓒ 이봉렬

30일 저녁 7시
회식 약속이 세 개나 잡혔다. 함께 일하던 직원 송별회, 동기들 모임, 친구들 모임…. 떠나는 사람 섭섭하게 만들어서야 되겠나 싶어 송별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고 식당엔 자리가 없다. 경기가 좋아진 걸까? 아니다. 선거 전날은 항상 이렇단다. 길가다 주운 지갑에서 몰래 돈을 빼쓰듯 '선거 전날=부담없이 노는 날'이 되어버렸다. 선거일에 쉬기 때문이다. 새벽 3시가 넘어도 사람들이 줄지 않는다. 어떻게 집에 돌아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31일 오전 8시
아이들 소리에 잠이 깼다. 늦었다. 일요일에도 교대로 출근을 해야하는 회사라 선거일에도 출근을 해야 한다. 아내는 내가 새벽까지 술을 마신 걸 보고, 출근 안 하는 날이다 싶어 일부러 깨우지 않았단다. 아이들도 학교에 가지 않는다. 거리의 차도 평소보다 확실히 줄었다. 하지만 회사 동료들은 대부분 출근해 있었다. 머리 긁적이며 자리에 앉았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만드는 사람은 젊은이가 아니라 어르신

오전 10시
<font color="a77a2">좌절... 절망... 31일 밤 5·31 지방선거에서 낙선한 한 후보의 자원봉사자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
좌절... 절망... 31일 밤 5·31 지방선거에서 낙선한 한 후보의 자원봉사자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오마이뉴스>에 접속하니 오전 9시까지의 투표율이 나와 있다. 11.5%. 지난 2002년 투표율보다 약간 높다고 한다.

지역별 투표율을 보다가 고향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 났다. 부산에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으신 어머니는 벌써 투표를 하셨단다. 몇 번 찍으셨냐고 여쭤보니 지난번에 절대 찍지 말라고 당부했던 그 번호는 아니니까 걱정 말라신다.

전주에도 전화를 했다. 장인 어른이 받으셨다. 역시 투표를 하셨단다. 안부인사를 한 뒤 몇 번을 머뭇거리다 몇 번 찍으셨냐니까 "그건 알아서 뭐하려고?" 하고 되물으신다. 그냥 웃고 말았다.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는 어머니도, 다리가 불편한 장인 어른도 투표는 꼭 하신다. 입으로만 민주주의 외치는 젊은이들보다는 조용히 투표하시는 그 분들이 이 땅의 민주주의에 더 도움이 된다.

오후 1시
점심 시간에 짬을 내어 투표를 하러 갔다. 누군가를 꼭 당선시켜야겠다는 마음으로 간 건 아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두 딸아이에게 오늘이 투표하는 날이라는 것을 알리고, 부모가 거기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어릴 때부터 민주주의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그걸 '산 교육'이라고 한다.

투표용지가 무려 6장이다. 후보자에 대해 미리 파악을 하고 왔는데도 헷갈린다. 컴퓨터 화면에 후보자들 사진과 정책을 올려 놓고 거기서 선택하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릴 적 투표하러 가는 아버지를 따라서 동사무소에 갔다가 봤던 그 모습과 지금은 전혀 다르지 않다. 인주 하나 사라졌을 뿐이다. 30년 동안 투표 방법이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은 정권을 잡은 이들이 실제로는 투표 자체를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긴다는 방증이 아닐까.

오후 5시
슬슬 퇴근 준비를 하면서 동료들과 커피 한 잔씩 마셨다. 들어보니 함께 일하는 열명 중에 투표를 마친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둘밖에 없다. 월드컵 평가전이 있을 때마다 회사 동료들과 5천원씩 걸고 경기 결과를 알아 맞추는 '스포츠 토토'를 하는데, 6월 4일 가나전을 앞두고 열 명이 다 돈을 걸었다. 총 상금 5만원이 걸린 '스포츠 토토'가 수백억에서 수천억원의 지역 예산을 다루는 살림꾼을 뽑는 선거를 이긴 셈이다.

지난 2주, 오랜만에 유권자로 대접받았다

저녁 7시
퇴근하고 집에 오니 벌써 투표는 마감되었다. 점심시간에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나 역시 투표를 하지 못할 뻔 했다. 투표일에도 일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다. 집 앞 폐지 수거함에 선관위에서 보내온 선거 홍보물이 봉투도 개봉되지 않은 채로 들어가 있는 게 유권자들만의 책임은 아니다.

저녁 9시
뉴스를 본다. 잔뜩 폼을 낸 스튜디오에서 모두가 예상했던 결과를 싱겁게 보도해 주고 있다. 중간중간 끼워 넣은 월드컵 관련 소식에 더 관심이 간다. 친구가 전화를 해서 "결과가 이래도 되는 거냐"고 따져 묻는다. "안 될 건 또 뭐 있냐"고 답했다.

나 역시 결과에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내가 선택한 후보는 단 한 명도 당선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걱정할 영역 밖의 일이다. 사표가 될 수 있으니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표를 몰아주자는 의견도 있지만 난 내 선택에 만족한다. 난 지지하는 후보의 당선을 위해 투표를 한 것이 아니라, 투표를 통해 나의 정치적 좌표를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위치에 있는 이들의 수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고, 그 수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어 좋았다. 투표율이 높고, 전략적 선택이 아닌 자기 이념대로 투표가 이루어졌다면 우리 국민의 정치적 지형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났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튼 최근 2주 남짓 유권자로서 정치인들로부터 대접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정치인들이 국민을 받들어 모실 것인가. 선거 좀 더 자주 했으면 좋겠다. 이 나라에서 진정 국민이 주인되는, 그런 정상적인 시절이 속히 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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