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를 하나 내겠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사'를 한자로 써보시오. 헐! 사람을 대체 뭐로 보느냐고 눈 흘기면서 호기롭게 답하리라. 둘 다 '역사'할 때 쓰는 그 '史'자요.
내 그럴 줄 알았다. 정말 날 뭐로 보는가. 내가 그렇게 쉬운 문제를 내겠는가. 난 문제를 내면서 두 개의 함정을 파놓았다. 두 책을 함께 거론함으로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사'자 가 당연히 같을 것이라는 암시와 <삼국사기>를 먼저 거론함으로써 너무도 당연하게 특정 글자가 답이 되도록 하기 위한 유도가 그것이다. 정답을 말하면 <삼국사기>의 '사'자는 '史'가 맞지만 <삼국유사>의 '사'자는 일사, '事'자이다.
그렇다고 상식 수준이 상식(?) 이하라고 낙담하지는 마시라. 여기 인터뷰하는 '삼국유사 전문가'인 인터뷰이 역시 한때는 그런 상식의 소유자였으니까.
어쨌든 이 <삼국유사>의 지은이 일연 스님이 오는 7월 6일(음력 6월 11일)이면 태어난 지 800년이 된다. 해서 다채로운 행사도 준비되고, 관련 책도 여럿 나오고 있다.
해설을 겸해 원전을 해석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와 일연의 일대기를 담은 <일연을 묻는다>(이상 개정판, 현암사 펴냄), 삼국유사에 나오는 현장을 답사한 <길 위의 삼국유사>(미래M&B)를 쓴 고운기(45) 연세대 연구교수를 만났다.
<삼국유사> 있어 외롭지 않은 20세기
"지난 20세기에 우리는 <삼국유사>가 있어 외롭지 않았습니다."
<삼국사기>와 더불어 고대사의 여러 면에 두루 많은 책임을 지운 책이라 하더라도 고운기 교수의 <삼국유사> 상찬은, 20년 연구자로서는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같은 일반인들에겐 시쳇말로 뻥이 잔뜩 들어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설명을 듣노라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삼국유사>가 나온 13세기는 고려 무신정권의 혼란스러움에다 몽고와의 전쟁, 그리고 몽고를 대리해 치러야 했던 일본 정벌 등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약소국의 비애를 절절하게 느껴야했던 시기. 듣기 좋은 말로 역사에서 '몽고의 간섭기'라고 하지만 사실상 식민지나 다름없던 시기였다.
특히 당, 송으로 이어지며 하늘 높은 줄 모르던 한족의 콧대가 변방의 오랑캐에게 푹 꺾였는데, 모든 것을 중국 중심으로 해석했던 우리의 <삼국사기>(김부식 지음)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더 이상 약발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럴 때 <삼국유사>가 나온다. 당시 국사이자 지식인이었던 일연이 짓밟힌 민족자존을 세우고, 민중의 처지를 위로할 요체가 무엇인지를 한 권으로 책으로 정리해낸 것이다.
"<삼국유사>를 통해 일연은 우리 민족의 자주의식을 드러내려고 했죠. 고려도 중국에 기대지 않고 주체적으로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민중들에게 희미하게나마 민족문제에 대해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삼국유사>는 20세기 한국의 선험적인 시대인 13세기의 시대적 상황으로 20세기의 민족적 위기 극복에 적잖은 거울이 되었습니다."
한국형 판타지의 보고
그리스 로마 신화나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같은데 열광하면서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제기랄! 우리에겐 왜 그런 멋진 신화나 설화가 없느냐. 과연 그럴까?
고운기 교수는 <삼국유사>가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역시 삼국유사 연구자다운 발언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을 줄 알겠지만, 잘못 짚었다.
<삼국유사>에는 신화나 설화가 가득하다. 환웅과 웅녀의 아들 단군왕검 이야기를 비롯하여 알에서 나온 삼국 시조의 탄생설화와 햇빛과 달빛을 살린 연오랑 세오녀, 귀신을 부린 비형랑, 선화공주에게 장가든 무왕, 몸을 바쳐 불교를 일으킨 이차돈, 신문왕이 받은 마법 같은 피리, 견훤과 지렁이, 호랑이처녀와 애틋한 사랑을 나눈 김현, 활을 잘 쏜 거타지 등 끝이 없다.
"<삼국유사>는 중국에 없는 신화만 모았습니다. 일본만 하더라도 건국신화부터 중국 신화의 틀을 그대로 가져가서 이름만 바꿨지만 <삼국유사>는 중국 얘긴 안하겠다는 원칙을 만든 것 같습니다."
그 예로 고운기 교수는 원효에 대한 설화를 들었다. <삼국유사>에서는 아예 원효 전기는 중국 승전기에 있기 때문에 쓰지 않고 일연이 알고 있는 것만 쓰겠다고 하고 써내려 간다.
또한 임금의 비밀을 안 두건 만드는 기술자가 죽을 무렵 끝내 참지 못하고 대나무 숲에 가서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다네'라고 외쳐 바람만 불면 대나무 숲에서 이 소리가 들려왔다는 이 설화는 서양 것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 왕이 이를 싫어하여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유수를 심었더니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네"라고만 들리더라나.
일본, 식민지 경영 위한 정보원으로 활용
그러나 <삼국유사>에 대한 우리의 대접은, 지금이야 고전가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라면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할 만큼 중요시 여기지만, 적어도 20세기에 들어오기 전에는 '홀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만큼 잊혀진 존재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같은 데서 어쩌다 인용될 뿐, 유교 국가였던 조선의 콧대 높은 유학자들은 승려가 쓴 이 책의 이름조차 밝히려 들지 않았다. 이렇게 거의 잊혀질 뻔했던 <삼국유사>의 가치를 재발견한 것은 일본에서 먼저였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 한 사람이 퇴각하면서 가져간 수많은 종류의 책 중 <삼국유사>가 포함되어 있었고, 1904년에 활자를 조판한 배인본(排印本) <삼국유사>를 출간한다.
이어 교토대학 이마니시 류(今西龍) 교수가 순암수택본(順庵手澤本, 순암 안정복이 소장했던 판본)을 손에 넣고 교정주기를 붙인 완본을 준비하다 관동대지진으로 원고가 소실되자 1926년 이를 저본으로 영인본 <삼국유사>를 내놓는다.
이때 이미 일본은 <삼국유사>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일본은 한국의 식민 지배를 위한 다양한 정보원으로 활용하려고 했다.
"같은 책을 가지고 한쪽은 식민지 경영을 위한 정보원으로, 다른 한쪽은 제국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썼던 셈입니다."
<삼국유사>에 대한 오해
이러 함에도 <삼국유사>는 우리 역사에서 단절 없이 중요시 되어온 것 같은 오해를 낳았고, 그 오해는 정사인 <삼국사기>는 믿을만하고, 야사인 <삼국유사>는 믿기 어려울 것 같다는 또 다른 오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관찬사서일 뿐인데 이를 확대해 정통사서로 격상시켜 각종 교과서 같은 데에서 <삼국사기>를 높이 평가하고 전범으로 삼기 때문이다.
언젠가 고운기 교수는 신라 재상 박제상을 김제상으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학부형들로부터 엄청난 항의를 받았다. 교과서에 박제상으로 나와 있는데, 김제상은 무슨 얼어 죽을 김제상이냐며 아이들이 시험을 망치면 책임질 거냐는 것이 항의의 주된 골자.
그러나 <삼국사기>에 나오는 박제상은 <삼국유사>에서는 김제상이다. 헐! 그래서 당연히 뒤따르는 질문. 어느 것이 맞느냐고 하자 고운기 교수는 "글쎄!"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 인터뷰 기사를 쓰는 한글 'hwp'도 박제상 아래에는 아무 줄도 안 그리며 맞춤법이 '맞다'고 하는데, 김제상 아래에는 빨간 줄을 그어대며 틀렸단다.
고운기 교수는 <삼국사기> 또한 대단히 중요한 역사책이며 <삼국유사>와 가치의 경중을 따질 성질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기능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면서 가장 많이 참고한 책이 <삼국사기>이며, <삼국사기>에 안 나오는 얘기를 중심으로 썼기 때문에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를 보충하거나 극복한 책이라는 것. 그래서 둘이 함께 있어야 진정한 가치를 발한다고 했다.
다양한 인간군상이 나와 사람 냄새 풀풀 풍기는 우리 판타지의 보고 <삼국유사>. <삼국유사>는 블록버스터 드라마인 MBC <주몽>을 보기 위해 텔레비전 앞으로 달려가는 당신에게 이렇게 권유한다. <삼국유사>에 들어있는 '주몽 이야기'부터 읽으시라.
| | 고운기 교수는 누구? | | | | "내 학문은 이 책에서 나와 이 책으로 또한 이룰 것이다."(余之學問 出於是書 而成於亦是書)
고운기 교수가 1980년대 초 산 영인본 <삼국유사> 맨 앞장에 직접 적어 넣은 글귀다. 이 글처럼 그는 지금 일연과 <삼국유사>를 주제로 한 여러 권의 책을 낸 자타가 공인하는 '삼국유사 전문가'이다.
중·고교 시절 필사본 시집을 직접 만들 만큼 문재를 가졌던 그가 문단의 말석이 명함을 들이민 것은 대학 3학년 말 신춘문예에 당선되어서다.
지금은 작고하신 최철 교수의 권유로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한문공부 하러 다니던 민족문화추진회의에서 <삼국유사>를 만났고, 시 창작 교수직까지 버리면서 일본 게이오대학에 방문연구원으로 가서 한·일 고시가 비교 연구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삼국유사>에 매달려 20여년 세월을 보내고 있다.
<나는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 등 3권의 시집을 낸 중견시인이지만 여전히 고전시가 연구에 매달려 있는 그는 앞으로는 경전 공부도 할 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삼국유사연구회'조차 결성돼 있지 않은 현실이 안타깝다며 엄청나게 많은 연구 논문과 자료들을 한데 모아 접근이 쉽도록 D/B화 작업을 할 수 있었으면 하고 절실하게 바라고 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