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깊이 생각했다면 조금 다른 것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지난해 단편집 <로또블루스>를 내놓으며 만화계의 새 기대주로 떠오른 변기현 작가. 칭찬을 많이 들었지만 스스로 썩 마뜩찮다.
변 작가는 불합리한 사회 모순에 희생당할 때, 타인의 이익과 내 행복이 어긋날 때, 하다못해 연애가 순조롭지 않을 때에도 문득문득 발견하곤 했던 크고 작은 분노들을 들려주고 싶었다.
누구나 마음속에 숨긴, 차마 내보이지 못하는 유치한 단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싶었다. 자기 안에 놓인 부조리와 모순, 사람들의 마음에 감춰진 비겁함을 꼬집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 처절한 '꼬집기'의 시작은 작은 미안함이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없는 것처럼 업신여겨지는 사람들을 위해서다.
또한 그들처럼 도태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고 우위를 점하면서 차츰 기득권의 단맛을 알아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목도한, 우리 가슴 속에 다시금 차오르는 '비겁함'을 다시 한 번 돌아보기 위해서다.
인간의 비겁함 꼬집고 싶었다
만화평론가 김낙호가 말했듯 단편집 <로또블루스>의 인물들은 대부분 어디론가 피하고 싶어하는 존재, 감히 탈출을 꿈꾸는 존재들이다.
목을 죄는 경제적 궁핍을 피하기 위해(<로또블루스>), 목숨을 혹은 목숨보다 더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요쿠르트 도시의 사랑>,
), 심지어 살찐 여자친구의 부담스런 몸매에서 벗어나기 위해(<레이디 앤 젠틀맨>) 몸부림치는 존재들.
그러므로 그들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고(<레이디 앤 젠틀맨>), 다른 이에게 찾아온 행운을 강탈하며(<로또블루스>), 제 엄마를 죽여서라도(<살인계획>) 상황을 모면하고자 한다. 그런 중에 인간 내면에 꽁꽁 감춰져 있던 '유치찬란한 본성'이 깨어난다.
<요쿠르트 도시의 사랑>, < FOOD >, <살인계획> 등 <로또블루스>에 실린 10편의 단편에서 변기현은 그것을 말하고 싶었다.
"가령 제아무리 점잖은 사람이라도 단지 자기가 싫어하는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 그토록 비열해질 수 있다는 거예요. 저부터도 그렇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는 유치한 면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그리고 싶었어요."
이 순간만 지나면 괜찮을 것으로 믿지만 상황은 끝나지 않는다. 피했다고 믿어도 주인공들은 자기가 파놓은 함정 같은 상황에 부메랑처럼 다시 얽혀든다.
그것은 인간 본성의 문제일까. 아니면 다 같은 욕망덩어리와 함께 뒤엉켜 살아야 하기 때문일까. 그 어느 쪽이든 피할 길은 없기에 비극은 더욱 커진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이 그토록 예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주인공들은 닥쳐오는 상황으로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얼굴을 화면 가득 들이민다. 과장된 것은 표정만이 아니다. 악하다기보다는 못된 결말들이 묘한 리얼리티를 준다.
인육 이야기의 끝이 주인공의 팔다리가 회 떠지는(< FOOD >)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누구나 생각해보았음직한 결론은 아니지만 그의 대답은 차라리 시큰둥하다.
"취향이죠, 뭐. (웃음) 제가 직접 표정을 짓고 그림을 그려요. 흔히들 그렇듯 외워서 그렸을 때의 표정에서 나오는 느낌 이상의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서요. 그러니 보다 섬세하게 표현해야 하고,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들어가는 주름 같은 것들을 살리고 싶어서요."
그런데 사실 그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이보다 더 컸다. 그가 의도한 것은 <요쿠르트 도시의 사랑>이나 < FOOD >에서처럼 사회와 질서에 대한 고민들이다. 길들여진 모든 것, 그래서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모순에 대한 고민이다.
"나도 모르게 어두운 면이 보이잖아요. 특히 우리나라처럼 모순이 많은 사회에서 그것을 그냥 지나치기란 어렵죠. 약간은 미안함 같은 거예요. 책임의식이라고 말하기엔 좀 거창하지만. 주변에 분명히 있지만 잘 잊히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이죠. 내가 그들을 잊어버리고 지나칠 수 없는 느낌 같은 거요."
사실 그런 부분들이 작품 안에 잘 녹아들지 못했다는 느낌에 그는 한 번 더 부끄러워한다.
만화가라기보다는 이야기꾼 되고파
만화가보다는 이야기꾼이 되고픈 게 먼저였다. 아마 약간만 경로가 달랐어도 만화가 변기현은 영화감독 변기현, 피아니스트 변기현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다지 빗나가 본 적 없는 이 청춘은 엄청난 소신이나 포부 대신 만화가 좋아서, 만화학과에 가겠다는 것만으로도 큰 반항(?)일 수 있었기에 만화가가 됐다.
"만화가에 대한 생각은 없었어요. 아직까지도 만화가에 대한 확신이 안 서요. 하지만 만화를 한다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져요. 지금 가장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일이 만화를 그리는 일이죠."
변기현은 '2003년 한일만화전 호프상'을 수상하면서 만화가로서 첫걸음을 뗐다. 같은 과(상명대 만화학과) 선배인 최규석과 단행본 <짜장면> 작업을 함께 하기도 했고 단편 <요쿠르트 도시의 사랑>으로 'LG동아 만화 페스티벌 극화부문 특별상'을 수상했다. 단편 <살인계획>으로 '2004년 서울 창작만화 공모 단편부문 대상', <로또블루스>로 지난해 '오늘의 우리만화상'과 '대한민국 만화대상 우수상'을 탔다.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만화가로서의 삶의 방식도 깨달아갔다. 생애 첫 단행본이었던 <짜장면> 작업 후에는 완전한 무일푼으로 경제적 시련에 단련됐다. "땡전 한 푼이 아쉬웠던, 작품 의뢰는커녕 아르바이트 한 자리 없던, 그리하여 공모전만이 살길이던" 때가 엄습해온 덕분이었다.
이제는 '선인세' 같은 말이 낯설지 않게 됐고 벨기에에서 전시회를 열어 "평생 할 만큼의 인터뷰"도 해보았다. 비록 돈은 못 벌지만 신문에 날 만한 실력은 부모님을 안심시킬 만했다.
'진솔한 부끄러움' 느낄 수 있게 하는 작품 그리고 싶다
그리고 이제 다시 도움닫기다. 변기현의 첫 장편 <고양이 Z>가 올여름 선을 보인다. 새 작품 <고양이 Z>의 구상과 사전작업은 사실 <로또블루스>가 나오기 훨씬 전인 재작년 겨울부터 시작됐다.
<고양이 Z> 작업이 늘어져 그 사이에 단편집 <로또블루스>가 먼저 나와 버렸다. 전체 2권인 <고양이 Z>는 현재 1권의 절반 가량 완성된 상태다. 8월쯤 1권이 나온 뒤 내년 2월 안에 2권이 나올 예정이다.
<고양이 Z>는 테마파크에서 일어난 연쇄폭행사건을 중심으로 인물의 현실과 환상이 씨실과 날실처럼 겹치는 구조의 이야기다. 성공한다면 이야기꾼으로서 변기현의 매력은 한층 더 올라갈 것이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20대 후반, 30대 초반 정도의 사람들이 겪었음직한 이야기다. 그들이 어릴 때 좋아했던 영웅의 몰락을 보여주며 꿈과 이상이 묻힐 때 사람들이 느끼는 처량한 감정 같은 걸 그리고 싶었다.
"사실 겁도 나요. 처음엔 안 그랬는데 길게 작업하다 보니 미친 짓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고, 책이 나온다고 누가 알아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아무도 모르는 '변기현'을 누가 알아서 책을 사줄까요."
걱정되고, 가끔은 정말 두려운 마음도 들지만 이 젊은 이야기꾼은 쉼없이 가슴에 고이는 이야기를 써내고 싶어 손이 근질거린다. 스릴러와 SF도, 연애물도 그리고 싶다. 그리고 숨겨져 있던 자신이 까발려지는 것 같은 진솔한 부끄러움을 읽는 이가 느낄 수 있는 내용을 그 안에 담고 싶다.
"제 고유한 스타일에 대한 고민 같은 건 미루기로 했어요. 언젠가 잡힐 테니까. 그때그때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어요. 아직 젊잖아요?"
젊은 그에게서 해묵은 여유가 풍긴다. 젊은 것으로 됐지, 열심히 그리다보면 뭔가 결판이 나겠지. 스스로 변화하는 모습을 변기현은 꿈꾸고 기대한다.
"사람들이 존경하는 만화가보다는 좋아하는 만화가가 되고 싶어요. 멋있다보다는 사랑스럽다 정도…?"
그가 사랑스럽게 웃으며 전하는 소망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CT News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