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출판 보리에서 펴내고 있는 겨레고전문학선집 13권 <우리 겨레의 미학 사상>이 나왔다. <겨레고전문학선집>은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문예출판사에서 펴낸 <조선고전문학선집>을 남한의 보리출판사에서 정식으로 출판 계약을 맺고 다시 펴내면서 붙인 이름이다.
보리출판사 정낙묵 대표는 ‘겨레고전문학선집을 펴내며’에서 “이 선집이, 겨레가 하나 되는 밑거름이 되고, 우리 후손들이 민족 문화 유산의 알맹이인 고전 문학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을 제대로 맛보고 이어받는 징검다리가 되기 바랍니다”고 적고 있다.
<우리 겨레의 미학 사상>은 북한의 문예출판사에서 1964년에 펴낸 <우리 나라 고전 작가들의 미학 견해 자료집>을 2006년 보리출판사에서 다시 펴낸 책이다. <우리 겨레의 미학 사상>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우리 옛 선비 33인이 쓴 문학과 예술론을 한 데 묶어놓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 한 권으로 우리는 이규보, 이제현, 김시습, 박지원, 정약용 등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최고의 문인들이 토해놓은 미학 사상을 한 눈에 들여다 볼 수 있다. 오늘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얻는데 고전(古典) 읽기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으리라.
지금으로부터 800여년 전 고려 시대 이인로의 <파한집>에서 설파하고 있는 문장론(文章論)은 지금 봐도 정확하고 절절하게 다가온다.
“이 세상 모든 사물 가운데 귀천과 빈부를 기준으로 높고 낮음을 정하지 않는 것은 오직 문장뿐이다. 훌륭한 문장은 마치 해와 달이 하늘에서 빛나는 것과 같아서, 구름이 허공에서 흩어지거나 모이는 것을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보지 못할 리 없으므로 감출 수 없다. 그리하여 가난한 선비라도 무지개같이 아름다운 빛을 후세에 드리울 수 있으며, 아무리 부귀하고 세력 있는 자라도 문장에서는 모멸당할 수 있다.”
이 책이 ‘미학 사상’이라는 이름을 달고는 있지만 어려운 이론과 철학으로 이루어진 미학서나 사상서가 아니다. 고려 초의 최행귀에서부터 조선 말의 신재효에 이르기까지 옛 선비 33인의 시와 산문 가운데서 문학(시)이란 무엇이고 문장이란 무엇인가, 어떤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답을 하고 있는 글들을 가려 발췌해서 싣고 있다.
시 짓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말과 뜻이 아울러 아름답기 힘드니라.
뜻이 함축되어 깊고 깊어야/씹을수록 그 맛아 순전해지느니.
뜻만 드러나고 말이 원활하지 못하면/깔깔해서 뜻이 잡히지 않나니.
그 중에서도 끝으로 돌릴 것은/다듬고 아름답게 꾸밈이니라.
아름다움을 어찌 나쁘다 하랴/이를 위해 곰곰이 생각해야 하느니.
그러나 꽃을 따고 알맹이를 버림은/시의 참뜻을 잃음이니라.
지금껏 많은 시인들이/시의 참뜻을 생각지 않고
겉으로 부질없이 울긋불긋 꾸미며/한때의 취미만을 찾고 있누나.
(하략)
-이규보 '시에 대하여'에서, <동국이상국집>
고려 시대 이규보의 시로 쓴 시론(詩論)이다. 시의 참뜻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글이다. 지금 우리 시대의 시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시론이다. “꽃을 따고 알맹이를 버림”의 문학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만든다.
또 그는 '시상의 미묘함을 논한다(論詩中微旨略言)'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시를 쓴 뒤에는 보고 다시 보되 자기가 쓴 것이 아닌 것처럼 보아야 하며, 남의 것처럼 보되 평생 미워하는 사람의 시로 생각하고 결점을 찾기에 노력하여 결점을 찾을 수 없이 된 뒤에 발표해야 한다. 이것은 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산문도 그러하다” 시 쓰기와 고쳐 쓰기 및 발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무서운 글이다.
또 조선 전기 서거정의 시론을 보자. 그는 '동인시화' 이인로의 시를 평하는 자리에서 “시란 것은 그리기 어려운 정경을 눈앞에 보이듯 묘사해야 한다.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이 시어 밖으로 나타나도록 해야 좋은 작품이다.”라고 적고 있다. 시에 대한 절묘한 정의가 아닐 수 없다.
박제가는 '명농초고'에서 “참다운 시는 모두 자기 목소리를 낸다.(眞詩各出自家音)”면서 시 쓰기에서 유명한 사람을 마냥 따라만 할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시인 공화국으로 불려지는 우리나라 문학계에 꼭 필요한 가르침이다.
우리 선조 문인 미학자들에게도 언제나 ‘내용’과 ‘형식’의 문제가 중요했던 것 같다. 금석학의 대가요, 서예가이면서 시인이었던 추사 김정희의 다음과 같은 글은 작품에 있어서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멋지게 규명해놓은 좋은 글이다.
문체의 종류가 열 세 가지인데 글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곧 정신, 이치, 기백, 맛, 격조, 음률, 소리, 빛이다. 그 여덟 가지 중에 정신, 이치, 기백, 맛은 글의 내용을 이루고 격조, 음률, 소리, 빛은 글의 형식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형식을 돌보지 않으면 내용이 어디에 담기겠는가?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처음 부딪히는 것은 형식이며 그 다음은 내용에 부딪히고 마지막에는 내용을 통하여 형식을 자유자재로 결정하게 된다. 이제 형식을 돌보지 않으면 내용에 파고들 수 없으며 더구나 내용을 통하여 형식을 자유자재로 규정하는 경지에는 이를 수는 없는 것이다.
-김정희「생각나는 대로 기록하다(雜識)」에서, <완당집>
문학과 예술을 둘러싼 영원한 물음들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명쾌한 답변을 한 권의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우리 겨레의 미학 사상>은 소중하고 값진 책이다. 같은 출판사에서 펴내고 있는 <겨레고전문학선집>의 다른 책들도 읽고 싶다. 열하일기, 이규보 작품집, 김시습 작품집 같은 책들의 책장을 빨리 펼쳐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