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이어령씨(나는 그가 우리 시대 지성의 화신이라고 본다)가 타전하는 21세기 전망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아날로그 시대에 대한 향수를 토로하는 목소리는 종종 들려왔지만, 이씨처럼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를 융합하려고 시도한 경우는 드물었다.
이씨는 이 책에서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의 연속성을 적시하고 각각의 장점으로 단점을 보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는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를 불연속적인 절단면으로 보는 경향이 강한 현대인들의 의식을 환기시켜 아날로그와 디지털, 가상현실과 실제 현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나아가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조화와 융합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의를 지닌다.
기술 결정론의 허구성
이처럼 이씨가 디지털 문법과 아날로그 문법의 절충을 모색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단층에서 '기술 결정론'이란 절리(節理)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기술이 바뀌면 시대와 사회가 변한다는 결정론적 신념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러나 저자는 그와 같은 신념이 허구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기술이나 발명품이 나와도 그것을 옛 개념으로 사용하는 한 진정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례로, 자동차가 처음 발명됐을 때 사람들은 이 혁신적인 문명의 이기를 '말[馬] 없는 마차'라고 부르며 말의 대용물 정도로 인식했다. 심지어 영국에선 자동차가 마차보다 빨리 달리면 벌금을 물어야 했다.
그런데 아날로그 시대가 디지털 시대로 급속히 이행하는 단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목도된다. 정보기술(IT)에 대한 인식 수준이 농경시대나 산업시대에 머물러 있는 가운데 IT의 본질을 도외시한 채 돈벌이 수단으로만 이용하다 거품이 빠져 알거지 신세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속출하는가 하면, IT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지나치게 미래를 낙관하는 경우도 있다.
저자는 이와 같은 과도기적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독점보다는 나눔을, 경쟁보다는 협력을, 폐쇄보다는 개방을 우선시하는 지식정보의 신개념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아날로그(analog)와 디지털(digital)을 상호 보완적으로 융합시킨 '디지로그(digilog)'란 신조어를 만들어낸다.
한국인이 이끄는 디지로그 세상
그렇다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융합한 디지로그 사회에서 한국인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저자는 "디지로그 시대의 주인공은 바로 한국인"이라고 단언한다. 저자는 그 근거로 한국의 전통 문화를 제시한다. 오방색(五方色)의 조화를 밑그림으로 하는 비빔밥, 어느 음식과도 조화를 이루는 김치 등을 예시하며 한민족 고유의 전통과 품성 속에 이미 디지로그적 유전인자가 녹아 있다고 말한다.
비단 비빔밥, 김치, 나물 등과 같은 전통 음식뿐만 아니라 한국의 여러 분야에서도 극단적 이해관계나 이념, 가치관 등이 암묵적으로 상호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적인 온기가 배제된 온라인 세상에서도 한국인 특유의 끈끈한 정(情)이 익명의 누리꾼들을 매개하는 갖풀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국인은 조화와 융합을 통해 끊임없이 자가발전해온 민족이다. 반만년 역사에서 터득한 조화와 융합의 지혜를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만나는 21세기에 유감없이 발휘한다면 민족 웅비의 숙원을 이룰 날도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버려라
그러나 민족 웅비의 숙원을 이루기 위해 내부의 갈등과 균열부터 먼저 치유해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다음과 같이 절절하게 당부한다.
"젊음의 열정은 엔진은 돼도 방향을 잡는 키가 되기는 어렵다. 사이버의 본뜻이 '키잡이'이듯이 배가 좌충우돌할 때 희망의 땅으로 갈 수 있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것은 기성세대이다. 그러나 강을 다 건넜으면 타고 온 뗏목은 버려야 한다. '되다'는 말 못지않게 버리란 말을 잘 쓰는 한국인이 아닌가. 잊어버리고 놓아버리고 내버리라고 하지 않는가. 무거운 뗏목을 메고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결혼하는 저 신시(神市)의 땅으로 갈 수 없다. 눈물나게 배고팠던 이 민족에 경제성장의 기적을 만들어준 자랑스러운 주역들, 짐승처럼 억압받고 살던 사람들에게 민주화의 빛을 밝힌 용감한 주역들, 그러나 이들이 자신을 버려야 또 하나의 새벽이 온다. 천방지축 달리는 위험한 아이들도 의젓한 어른이 '되어' 이 강가로 올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뗏목을 골라 강을 건널 것이다. 그날을 위해 디지로그의 시대가 지금 어떻게 오고 있는지, 한국인이 그 시대의 주역이 되어 새로운 문명을 끌고 가는 디지로그 인간이 되려면 어떻게 세계를 향해 '사람'을 살리라고 외쳐야 하는지 그 발성법을 익혀가야 한다."
이 책은 저자가 <중앙일보>에 연재한 칼럼을 엮은 단행본이다. 저자의 기본적인 시각은 <중앙일보>의 프레임(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원로를 자처하는 어른들이 주로 왜곡된 역사인식과 냉전적 가치관을 맹신하는 것에 비하면 저자는 합리주의적 학문의 토대 위에 철학, 가치관, 사유 등을 구축해 왔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소통의 여지가 많아 보인다.
이 책 <디지로그>가 가치 있는 이유는 '디지로그'란 신개념을 소개해서가 아니라 저자가 사회 원로로서의 도의적 책임을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다른 원로들처럼 모든 책임을 젊은이들에게 전가하거나 발뺌하지 않고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버려라"는 완곡한 어법으로 기득권을 포기하라고 종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21세기에 한민족이 세계로 웅비하기 위해선 먼저 내부의 갈등과 균열부터 치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기성세대와 신세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회지도층과 서민층,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 경영자와 노조 등이 한 걸음씩 양보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버려야 할 뗏목은 과감히 버리고, 다같이 힘을 모아 오대양을 힘차게 누빌 튼튼한 배를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