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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에 접어들면서 접시꽃이 피기 시작하였습니다. 붉고 흰 접시꽃이 모로 세워져 줄기에 걸려 있는 모습을 보면 왜 접시꽃이라고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접시는 바로 놓여 음식을 담을 수 있어야 그 쓰임이 있을 텐데,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경남 합천 적중면에 있는 대안학교인 원경고등학교가 아이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떠나는 날 아침에도 마을 길가에 접시꽃이 밝게 피어 지리산을 종주할 아이들을 배웅하는 듯하였습니다.

▲ 지리산, 저 넉넉한 품 속에 아득히 안기고 싶습니다.
ⓒ 정일관
해마다 봄이 되면 전국 대부분의 대안학교에서는 지리산 종주 등반이라는 체험학습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합니다. 이미 5월 하순에 많은 학교에서 지리산을 다녀왔고, 6월 초순에까지 이어져, 그야말로 5월 중순에서 6월 초순까지를 지리산 체험학습 기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4월 말경이나 5월 초에 접어들면 학교에서는 이미 지리산 등반 계획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예산 편성에 모둠 짜기와 식단 편성, 장비 구입, 학년별 코스 배정, 산장(대피소) 예약, 부식과 준비물 구입, 등산 요령과 유의사항 교육 등을 순차적으로 시행하고 중간 중간에 끊임없는 점검과 정신교육을 병행하였습니다.

특히 학생들의 체력을 단련하기 위해 학교 뒷산인 미타산 오르기를 두 차례 시행하였고, 학생자치회와 의논하여 매일 밤 9시에 모든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다 함께 운동장 달리기를 하였습니다. 밤 시간에 전교생이 운동장에 불을 켜고 달리는 모습은 진풍경이었습니다.

▲ 뱀사골 산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출발하기 전에 펼침막을 들고. 1학년들의 지리산 주제어는 "희망"입니다.
ⓒ 정일관
그리고 마침내 6월 6일, 1학년은 뱀사골 계곡을 올라 천왕봉으로 가는 코스를, 2학년은 중산리에서 천왕봉을 먼저 올라 뱀사골 계곡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3학년은 화엄사 계곡을 지나 노고단을 거쳐 천왕봉으로 나아가는 코스를 통해 각각 종주 등반을 하였습니다.

저는 1학년을 따라 뱀사골 코스로 종주에 참가하였습니다. 반선에서 차를 내려 야영장에서 준비해간 김밥을 나누어 먹고 드디어 출발을 하였습니다. 반선에서 뱀사골 산장까지는 약 9.5km. 세 시간 반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고, 일찍 출발한 까닭에 첫날은 가뿐한 산행이 될 것으로 예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산행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학생의 신발 밑창이 덜렁거리기 시작하였고, 끝내 떨어져 나가 버리는 바람에 결코 순탄치 않은 산행을 예고하였습니다. 한 선생님이 가지고 있던 노끈으로 밑창을 칭칭 동여매고 어떻게 해서든지 산장까지는 올라가자고 하여 겨우 겨우 한 걸음씩 내디뎠고, 나중에는 끈도 끊어져 밑창을 손에 들고 올랐습니다. 발바닥이 아프다고 호소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 등산화 끈을 다시 한 번 조이고 있는 여학생의 모습에 긴장감마저 느끼게 됩니다.
ⓒ 정일관
뱀사골은 여전히 아름다워서 곳곳에 장관을 펼쳐놓아 넋을 앗아갔습니다. 한 편으로 자연을 감상하며 한 편으론 뒤처진 아이들을 데리고 가며 뉘엿뉘엿 올라가다보니 어느덧 5시간이 넘게 걸려 산장에 도착하였습니다. 다행히 산장 아저씨가 본드통을 가지고 와서 떨어진 밑창에 본드를 잔뜩 발라 붙여주어서 한 시름을 놓게 되었습니다.

▲ 지쳐 힘들어 하는 여학생을 격려하고 있는 선생님.
ⓒ 정일관
이튿날 산행은 연하천 산장과 벽소령 산장을 거쳐 세석 산장까지 가는 먼 여정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새벽 5시에 깨워 급히 아침밥을 해먹고 어제 뒤처진 아이들을 앞장 세워 화개재를 넘었습니다. 곧바로 이어지는 토끼봉에 모두가 숨이 턱에 찼고, 한 여학생은 힘이 들어 여러 번 주저앉았지만 그럴 때마다 인솔하는 선생님은 재촉하고 격려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나아갔습니다.

▲ 벽소령 산장을 지나 선비샘 가는 길에 대열을 맞추어 산행하는 아이들의 힘찬 뒷모습.
ⓒ 정일관
벽소령 산장에서 점심을 해먹고 세석 산장을 행해 갔습니다. 선비샘 가는 길부터 지리산은 조금씩 발 아래 펼쳐진 계곡과 능선 줄기를 보여주기 시작하였습니다. 망망하게 펼쳐진 지리산의 너른 품을 보면서 아이들은 힘든 와중에도 감탄하면서 쉬어 갔습니다. 등산하는 묘미가 이런 데 있음을 알겠습니다.

▲ 잠시 쉬어가는 길에 남긴 추억. 저기 희망의 봉우리가 있어요.
ⓒ 정일관
신발 밑창이 떨어진 학생이 결국 맨 마지막으로 뒤처지게 되어 저는 또 그 아이를 데리고 산행을 하였습니다. 등산화도 부실하였지만 산행도 무척 어설퍼서 꼴찌로 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얘기를 함께 나누며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는 우리는 학교 울타리 안에서 만날 때 알 수 없었던 깊은 속을 알게 되었습니다.

덜렁거리고 산만하고 움직였다 하면 사고를 내 요주의 인물이었던 그 아이도 착하고 고운 심성이 있고, 부모님과 선생님에 대한 죄송함도 갖고 있었으며, 지리산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줄 아는 아이였습니다. 세석 산장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우리가 10시간이 넘게 산행했음을 알았습니다.

▲ 지리산 고사목을 한 아이가 멈추어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 정일관
3일째 되는 날은 장터목을 거쳐 천왕봉을 올라 중산리 계곡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새벽부터 비를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산행에서 비를 만난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인데, 헤치고 가야 할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 세석 산장에서 밑창이 떨어져 나간 아이의 등산화를 끈으로 다시 한 번 묶어주고 있습니다.
ⓒ 정일관
일단 장터목 산장까지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힘을 내 산을 탔습니다. 비도 내렸지만 안개가 계속 밀려들었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 몸을 가누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장터목 산장에 도착하였을 때, 아이들은 이미 체온이 떨어져 벌벌 떨었습니다. 천왕봉까지는 도무지 무리여서 바로 중산리로 하산을 결정했습니다. 전북 완주의 세인고등학교와 전남 보성의 한 고등학교도 서둘러 하산하였습니다.

▲ 비옷을 챙겨입고 세석 산장을 떠나기 전. 아직 비 맞으며 가는 산행이 어떤지를 잘 모르는 천진한 모습들입니다.
ⓒ 정일관
가파르고 지루한 하산길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침묵 속에서 조심 조심 미끄러운 돌을 밟았고, 비에 젖어 체온이 떨어지니 쉴 새 없이 하산하였습니다. 다리가 풀려 고생한 아이도 있었지만 모두 중산리 야영장에 도착하였을 때, 아이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환호하였습니다. 등산화 밑창이 떨어졌던 예의 그 학생도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떨어진 밑창을 들고 밝게 웃었습니다.

▲ 세석 산장에서 장터목 산장으로 가는 도중에 앞서 가는 두 아이를 찍었습니다. 아이들의 표정이 밝습니다.
ⓒ 정일관
학교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들과 선생님들은 완전히 골아 떨어졌습니다. 비록 천왕봉은 밟지 못했지만 그 어느 해 지리산 종주등반보다 힘든 산행을 한 우리 아이들은 학창 시절, 소중한 추억의 책갈피 하나를 장만하였을 것입니다. 한 아이가 말했습니다.

“지리산 산행은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고, 날씨도 좋았다가 비가 왔다가 하는 것이 앞으로 살아갈 우리 인생길 같아요.”

이로써 대안학교 최고, 최대의 체험학습이며, 최장의 역사를 가진 체험학습인 지리산 종주 등반이 모두 끝났습니다. 아이들과 선생님들은 험난한 삶의 여정 같은 지리산을 타면서 또 한 번 성숙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날이 개고 화창한 햇살이 부서지는 학교와 주변 마을에 접시꽃이 여전히 환하게 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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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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