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표가 2년 3개월의 당 대표 임기를 마치고 본격적인 대권 행보에 들어섰다. 대선 출마자는 선거 1년 6개월 전, 당직을 맡을 수 없는 규정으로 인해 박 대표는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고 사임 의사를 밝혔다. 퇴임식은 오는 16일 염창동 당사에서 열린다.
최근 박 대표는 기자간담회를 연이어 열고 있다. 방송·일간지 반장 모임, 사진·방송카메라 기자 모임에 이어 13일 인터넷 기자들을 포함한 방송·일간지 기자간담회가 있었다. 여의도 모중식당에서 오찬을 겸한 간담회였다. 끝으로 지방지 기자간담회가 남아 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표는 "돌이켜보면 탄핵역풍으로 바람 앞에 촛불처럼 어려운 시절 대표를 맡아 2년 3개월을 보냈는데 대과없이 소임을 마치게 되어 보람을 느낀다"고 소회를 밝혔다. 또한 박 대표는 "4·15 총선 때가 가장 힘들었다"며 "노력해서 이만큼 살아났고, 일어서게 해준 국민에게 보답하겠다"고 다짐했다.
'탄핵'으로 출발해 '피습'으로 끝난 선거 마술
박근혜 하면 선거였다. 죽은 선거를 박 대표가 살려 놓았고, 선거가 오늘의 박 대표를 있게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대표의 지지도 추이는 '선거' 국면에서 늘 상한가를 쳤다.
그의 말마따나 대통령 탄핵안 가결 역풍으로 풍전등화 같았던 한나라당을 '싹쓸이만은 막아달라'고 호소해 견제 의석을 따냈다. 몇 번의 재보궐 선거도 모두 승리로 이끌어 열린우리당의 대표를 중도하차시키기도 했다.
박 대표가 진두지휘할 수 있는 선거는 5·31 지방선거가 마지막이었다. 사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박 대표의 역할은 크지 않았다. 이미 한나라당의 압승이 예상되는 상황이었고, 자존심 대결을 벌일 서울시장 선거는 박 대표의 유명세를 빌리지 않고도 '오세훈'이라는 간판으로 치를 분위기였다.
하지만 선거 막바지 터진 '피습' 사건은 박 대표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다. 모든 이슈를 삼키는 '블랙홀'처럼 박 대표의 동정이 언론을 장식하던 상황, 그 유명한 '대전은요?' 발언이 선거 구도를 확 바꿨다. 한나라당이 호남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뒤처지고 있는 대전과 제주의 판세가 급부상했다.
당시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은 "정말 박 대표가 그런 말을 했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이라면 참 대단한 분"이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결과는 주효했다. 근소한 차이로 앞서고 있던 열린우리당 후보를 한나라당 후보가 앞지르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대전에서 한나라당 지지도는 열린우리당에 비해 훨씬 앞섰지만 '인물'이 받쳐주지 못하던 차, 박 대표의 한 마디가 변수가 된 것이다.
이번 기자간담회에서 '진짜 그 발언을 본인이 한 것이냐'고 묻자 "있는 그대로"라며 "병실에 실려가 눕게 되었는데 흔들림 없이 잘 치러달라고 부탁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맨 처음 전한 유정복 비서실장은 "바깥 소식을 모르는 상황에서 속으로 굉장히 걱정이 많았던 것 같다"고 부연했다.
사실 박 대표의 이 말은 '사장'될 수도 있었다. 박 대표를 접견하고 나온 유 비서실장은 브리핑할 게 별로 없다고 여겼으나, 박 대표의 반응을 꼬치꼬치 묻는 과정에서 기자들에 의해 '포착'된 말이었다. 이정현 부대변인은 "묻힐 수도 있었는데 뉴스가 되었다"고 말했다.
7개월 동안 박 대표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해온 유 실장은 "복잡한 의미를 깔고 말하는 분이 아니"라며 "사실을 간단명료하게 전달해 오해살 게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박 대표의 이 '무서운 단순성'에 대해 "체득된 강인함"이라고 설명한다.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 "3·8선은 괜찮냐"고 말했던 박 대표였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퇴원 후 대전으로 간 것에 대해 박 대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병원에서 다른 당원들에게 편지를 써서 최선을 다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는데 나라고 집으로 갈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선거기여도' 크지만 '자기업적'이 없다
박 대표의 '부상 투혼'으로 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이번 지방선거의 승리는 박 대표의 몫으로 돌아왔다. 경쟁자인 이명박 시장은 "집권여당의 정책실패에 따른 반사이익, 박근혜 대표의 피습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묘한 견제심리를 드러냈다.
'탄핵'으로 출발한 박 대표의 임기는 '피습'으로 마무리되었다. 동기는 불우했지만 결과는 승리였다.
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연구실장은 "선거 후에는 지지도가 올랐지만 정책 논쟁이 일 때는 지지도가 하락했다"고 지적한다. 행정복합도시특별법이 대표적이다. KSOI 조사에 따르면, 당시(2005년 3월) 박 대표의 직무수행 지지도는 48% 정도로 떨어져 가장 낮았다. 사학법 재개정도 패착으로 평가된다.
선거가 끝나면 박 대표의 지지도는 하향 곡선을 그렸다. 한 실장은 "선거 국면에선 참여정부 심판론으로 지지세력의 결집력을 높이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면서 이완되는 결집력을 뒷받침할 만한 다른 요인을 제공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청계천 복원 등 자신의 고유한 성과를 지닌 이명박 시장과 대비되는 점이다.
정부여당의 '무능'을 심판했지, 대중에게 각인된 자기만의 업적이 없다는 게 박 대표의 약점이다. 한나라당이 정책정당으로서 부각되지 못했다는 지적에 대해 박 대표는 "언론이 많이 다뤄주지 않았다"며 "한국 사람들은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라고 시키다가 막상 노래하면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억울해했다.
한 정치컨설턴트는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없다"고 말한다. 박 대표는 이제 '자신의 선거'를 남겨 두고 있다. 2006년 후보 경선과 2007년 대선. 대국민 메시지를 제시할 때다.
한편 박 대표는 퇴임 후 일정에 대해 "건강 회복이 우선"이라며 "그동안 쉬지 못했다, 재충전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언제쯤 재충전이 끝나냐는 질문에 박 대표는 "여러분이 보고싶다고 그러시면 나올게요"라고 말하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