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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퇴임을 앞둔 13일 서울 여의도의 한 중식당에서 중앙지 및 인터넷 매체 출입기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퇴임을 앞둔 13일 서울 여의도의 한 중식당에서 중앙지 및 인터넷 매체 출입기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박근혜 대표가 2년 3개월의 당 대표 임기를 마치고 본격적인 대권 행보에 들어섰다. 대선 출마자는 선거 1년 6개월 전, 당직을 맡을 수 없는 규정으로 인해 박 대표는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고 사임 의사를 밝혔다. 퇴임식은 오는 16일 염창동 당사에서 열린다.

최근 박 대표는 기자간담회를 연이어 열고 있다. 방송·일간지 반장 모임, 사진·방송카메라 기자 모임에 이어 13일 인터넷 기자들을 포함한 방송·일간지 기자간담회가 있었다. 여의도 모중식당에서 오찬을 겸한 간담회였다. 끝으로 지방지 기자간담회가 남아 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표는 "돌이켜보면 탄핵역풍으로 바람 앞에 촛불처럼 어려운 시절 대표를 맡아 2년 3개월을 보냈는데 대과없이 소임을 마치게 되어 보람을 느낀다"고 소회를 밝혔다. 또한 박 대표는 "4·15 총선 때가 가장 힘들었다"며 "노력해서 이만큼 살아났고, 일어서게 해준 국민에게 보답하겠다"고 다짐했다.

'탄핵'으로 출발해 '피습'으로 끝난 선거 마술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17대 총선을 이틀 앞둔 2004년 4월 13일 후보 지원유세를 하고 있다. 박 대표가 지원유세를 하며 많은 악수를 한 탓에 손에 붕대를 감고 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17대 총선을 이틀 앞둔 2004년 4월 13일 후보 지원유세를 하고 있다. 박 대표가 지원유세를 하며 많은 악수를 한 탓에 손에 붕대를 감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박근혜 하면 선거였다. 죽은 선거를 박 대표가 살려 놓았고, 선거가 오늘의 박 대표를 있게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대표의 지지도 추이는 '선거' 국면에서 늘 상한가를 쳤다.

그의 말마따나 대통령 탄핵안 가결 역풍으로 풍전등화 같았던 한나라당을 '싹쓸이만은 막아달라'고 호소해 견제 의석을 따냈다. 몇 번의 재보궐 선거도 모두 승리로 이끌어 열린우리당의 대표를 중도하차시키기도 했다.

박 대표가 진두지휘할 수 있는 선거는 5·31 지방선거가 마지막이었다. 사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박 대표의 역할은 크지 않았다. 이미 한나라당의 압승이 예상되는 상황이었고, 자존심 대결을 벌일 서울시장 선거는 박 대표의 유명세를 빌리지 않고도 '오세훈'이라는 간판으로 치를 분위기였다.

하지만 선거 막바지 터진 '피습' 사건은 박 대표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다. 모든 이슈를 삼키는 '블랙홀'처럼 박 대표의 동정이 언론을 장식하던 상황, 그 유명한 '대전은요?' 발언이 선거 구도를 확 바꿨다. 한나라당이 호남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뒤처지고 있는 대전과 제주의 판세가 급부상했다.

당시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은 "정말 박 대표가 그런 말을 했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이라면 참 대단한 분"이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결과는 주효했다. 근소한 차이로 앞서고 있던 열린우리당 후보를 한나라당 후보가 앞지르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대전에서 한나라당 지지도는 열린우리당에 비해 훨씬 앞섰지만 '인물'이 받쳐주지 못하던 차, 박 대표의 한 마디가 변수가 된 것이다.

이번 기자간담회에서 '진짜 그 발언을 본인이 한 것이냐'고 묻자 "있는 그대로"라며 "병실에 실려가 눕게 되었는데 흔들림 없이 잘 치러달라고 부탁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맨 처음 전한 유정복 비서실장은 "바깥 소식을 모르는 상황에서 속으로 굉장히 걱정이 많았던 것 같다"고 부연했다.

사실 박 대표의 이 말은 '사장'될 수도 있었다. 박 대표를 접견하고 나온 유 비서실장은 브리핑할 게 별로 없다고 여겼으나, 박 대표의 반응을 꼬치꼬치 묻는 과정에서 기자들에 의해 '포착'된 말이었다. 이정현 부대변인은 "묻힐 수도 있었는데 뉴스가 되었다"고 말했다.

7개월 동안 박 대표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해온 유 실장은 "복잡한 의미를 깔고 말하는 분이 아니"라며 "사실을 간단명료하게 전달해 오해살 게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박 대표의 이 '무서운 단순성'에 대해 "체득된 강인함"이라고 설명한다.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 "3·8선은 괜찮냐"고 말했던 박 대표였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퇴원 후 대전으로 간 것에 대해 박 대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병원에서 다른 당원들에게 편지를 써서 최선을 다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는데 나라고 집으로 갈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선거기여도' 크지만 '자기업적'이 없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소장 김헌태)가 지난 2년 동안 조사한 박근혜 대표의 직무수행 지지도 추이. '선거 국면'에서 박 대표의 지지도는 상승세를 탄 반면, 행정도시법 등 '정책 국면'에선 하향곡선을 그렸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소장 김헌태)가 지난 2년 동안 조사한 박근혜 대표의 직무수행 지지도 추이. '선거 국면'에서 박 대표의 지지도는 상승세를 탄 반면, 행정도시법 등 '정책 국면'에선 하향곡선을 그렸다. ⓒ 오마이뉴스 고정미
박 대표의 '부상 투혼'으로 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이번 지방선거의 승리는 박 대표의 몫으로 돌아왔다. 경쟁자인 이명박 시장은 "집권여당의 정책실패에 따른 반사이익, 박근혜 대표의 피습 등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묘한 견제심리를 드러냈다.

'탄핵'으로 출발한 박 대표의 임기는 '피습'으로 마무리되었다. 동기는 불우했지만 결과는 승리였다.

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연구실장은 "선거 후에는 지지도가 올랐지만 정책 논쟁이 일 때는 지지도가 하락했다"고 지적한다. 행정복합도시특별법이 대표적이다. KSOI 조사에 따르면, 당시(2005년 3월) 박 대표의 직무수행 지지도는 48% 정도로 떨어져 가장 낮았다. 사학법 재개정도 패착으로 평가된다.

선거가 끝나면 박 대표의 지지도는 하향 곡선을 그렸다. 한 실장은 "선거 국면에선 참여정부 심판론으로 지지세력의 결집력을 높이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면서 이완되는 결집력을 뒷받침할 만한 다른 요인을 제공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청계천 복원 등 자신의 고유한 성과를 지닌 이명박 시장과 대비되는 점이다.

정부여당의 '무능'을 심판했지, 대중에게 각인된 자기만의 업적이 없다는 게 박 대표의 약점이다. 한나라당이 정책정당으로서 부각되지 못했다는 지적에 대해 박 대표는 "언론이 많이 다뤄주지 않았다"며 "한국 사람들은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라고 시키다가 막상 노래하면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억울해했다.

한 정치컨설턴트는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없다"고 말한다. 박 대표는 이제 '자신의 선거'를 남겨 두고 있다. 2006년 후보 경선과 2007년 대선. 대국민 메시지를 제시할 때다.

한편 박 대표는 퇴임 후 일정에 대해 "건강 회복이 우선"이라며 "그동안 쉬지 못했다, 재충전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언제쯤 재충전이 끝나냐는 질문에 박 대표는 "여러분이 보고싶다고 그러시면 나올게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지난 2004년 3월 23일 한나라당 대표에 선출된 박근혜 대표는 바로 이튿날 당사를 천막으로 옮겼다. 박 대표가 당직자들과 당 현판을 들고 천막당사로 걸어가고 있다.
지난 2004년 3월 23일 한나라당 대표에 선출된 박근혜 대표는 바로 이튿날 당사를 천막으로 옮겼다. 박 대표가 당직자들과 당 현판을 들고 천막당사로 걸어가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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