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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하종오 시집 <지옥처럼 낯선>
시인 하종오 시집 <지옥처럼 낯선> ⓒ 랜덤하우스중앙
서른 줄 사내는 골목에서 이불을 주워 왔다
마흔 줄 사내는 폐차장에서 담요를 주워 왔다
오십 줄 사내는 쓰레기 하치장에서 카펫을 주워 왔다

그리하여 세 사내는
밤마다 온몸에 말고
지하도에 누워서 잠들고
낮마다 접어서 옆구리에 들고
역전에서 어슬렁거리고
아무리 담배가 당겨도
한 사람에게서 한 개비만 얻어
아끼며 맛나게 피웠다

서른 줄 사내는 꼭 한 번 카펫을 덮고 싶어했다
마흔 줄 사내는 꼭 한 번 이불을 덮고 싶어했다
오십 줄 사내는 꼭 한 번 담요를 덮고 싶어했다

-74쪽, '지옥처럼 낯선' 몇 토막


이 세상에 그 어떤 형상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사람들의 눈에 쉬이 띌 수가 있다. 하지만 그 모습의 속내에 감추어진 진실은 겉모습을 아무리 요리조리 뜯어보아도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겉모습이 요란한 치장과 함께 휘황찬란하게 빛이 날수록 그 속내에 담긴 진실은 더더욱 찾기 어렵다.

요즈음 사람들은 물건이든 사람이든 우선 매끈하게 잘 빠진 겉모습에 너무 매달리는 것만 같다. 어디 한 군데라도 군더더기가 있거나 초라해 보이기라도 하면 그 속내가 아무리 알차고 단단해도 고개를 돌리기 십상이다. 게다가 어떤 물건 하나를 구입하더라도 조금만 싫증이 나면 새 것, 헌 것 가리지 않고 금세 내다 버리기 일쑤다.

사람이 물질을 이끌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사람을 이끌고 나가는 꼴이다. 즉, 물질자본주의가 천민자본주의로 탈바꿈하고 있다는 그 말이다. 이러한 천민자본주의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사람의 존재가치는 점점 사라진다.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에 물질이 떡 하니 버티고 앉아 사람보다 더 큰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금세기 초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시대인가. 어떤 이는 자신이 망가뜨린 농촌으로 되돌아가려 하고 있지는 않는가. 어떤 이는 자신의 몫이 아닌 이익을 챙길 수 있는 도시에만 머물려 하고 있지는 않는가. 어떤 이는 자신이 만들지 않은 간난에 헤매고 있지는 않는가." -'시인의 말' 몇 토막

지난 2004년 여름, 물질자본주의 속에 허우적거리는 도시적 삶과 외국인 노동자들의 소외된 삶, 시대에 뒤처진 노인들의 우울하고도 힘겨운 삶을 그린 시집 <반대쪽 천국>(문학동네)을 펴냈던 하종오(52) 시인이 지난 3월 새 시집 <지옥처럼 낯선>(랜덤하우스중앙)을 펴냈다.

<반대쪽 천국>과 짝을 이룬 이번 시집에는 'CCTV' 연작을 주춧돌로 삼아 우리 사회를 비판하는 시(1부)와 자본주의적 삶의 모순의 핵을 찌른 '마케팅 에피소드' 연작(2부)이 실려 있다. 이어 소외된 노숙자들의 슬픈 삶을 그린 시(3부), 시인의 생활을 뿌리로 삼은 반성적 시(4부), 시인의 가족을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낸 시(5부), 65편이 아우성을 지른다.

시인 하종오는 '시인의 말'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그 모든 이들이 누군가에 의해 감시되고 있지는 않는가"라고 되묻는다. 시인은 "국가와 기업 중 무엇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있는가, 개인이 생을 지탱하는 힘은 경영자와 노동자와 소비자에게서 나오는가"라며, 이번 시집에 실린 시가 그 실체의 일면이라도 진실로 그려지기를 원했다고 말한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 하종오는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 사이를 가로막는 그 괴물 같은 자본주의의 속내를 엿본다. "어미와 딸년은 손이 닮았지만/ 어미가 밭 매고 나면 호미가 닳았고/ 딸년이 광고 사진 찍고 나면 상품이 빛났다"(손 모델)처럼, 시인은 자본주의가 낳은 우리 사회의 모순의 실체를 어머니와 딸의 삶을 통해 세밀하게 꼬집어낸다.

오로지 물질만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시대, 그 시대에도 어미는 오로지 농사짓는 일만이 가족들의 식의주를 해결하는 천직으로 삼아 "호미 쥐고 밭을 매"다가 저녁때가 되면 아픈 손가락을 찬 물에 담그고 주무른다. 하지만 물질자본주의를 동무처럼 데리고 살아가야 하는 딸은 "상품 들고 광고 사진을 찍"다가 저녁때가 되면 "손가락이 미뻐서 뜨거운 물에 담그고" 예쁘게 다듬고 있다.

"한 해 내내 살아남으려면 손을 가꾸어야 한다"며, 어미와 딸년은 저녁때만 되면 손을 주무르고 다듬지만 텃밭에서 채소를 가꾸는 어미의 거친 손은 그 "채소를 먹는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딸년의 손, 가늘고 길고 매끄럽고 부드러운 하얀 손은 "상품 쓰는 누구의 기억에도 아름답게 남"(손 모델)는다는 것이다.

공기가 탁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숨 막히기를 원한다 그들은

숲이 적어질수록 속으론 반가워하면서
겉으론 나무를 많이 심어야 한다고 말한다
들판이 적어질수록 속으론 반가워하면서
겉으론 들풀을 많이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오랜 연구 끝에 개발한 신제품은
산바람을 불게 하고 나뭇잎 냄새를 낸다
그들이 오랜 투자 끝에 개발한 신제품은
들바람을 불게 하고 풀꽃 냄새를 낸다

-56쪽, '마케팅 에피소드-신제품' 몇 토막


시인은 상품을 껍데기만 적당히 바꿔 새로운 제품으로 탈바꿈시켜내는 기업들의 속내를 들여다본다. 소비자들의 신제품에 대한 욕구를 톡톡 건드리며, 물질자본을 천민자본으로 타락시키며 떼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기업들은 "공기가 흐리고 사람들이 헐떡일수록" 속으로 환호성을 지른다.

기업들은 자기들이 오랜 연구 끝에 개발했다는 환경 관련 신제품을 내밀며, 대자연이 아무리 망가져도 끄떡 없다는 듯이 선전한다. 물론 겉으로는 "나무를 많이 심어야 한다고", "들풀을 많이 키워야 한다"고 떠든다. 하지만 만약 기업들의 말처럼 산에 숲이 우거지고 들판이 푸르러지면 그들이 만들어낸 환경 관련 신제품은 어찌되겠는가.

시인은 꼬집는다. 기업들은 기업들대로 "먼지가 더 자욱해야 한다고 속삭"이고, "매연이 더 자욱해야 한다고 속삭이지만/ 자신들이 먼저 죽어간다는 걸"(마케팅 에피소드-신제품), 제눈 제가 찌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소비자들은 소비자들대로 "한 회사가 옷을 만들어서/ 희디흰 풀이라고 브랜드를 붙히면/ 다른 회사가 옷을 만들어서/ 희디흰 꽃이라고 브랜드를 붙인다"(마케팅 에피소드-브랜드)는 것을 정말 까맣게 모르고 있다고.

오로지 돈벌기에만 급급한 기업들의 속내는 그들이 끝없이 만들어내는 신제품과 쌍둥이다. 신제품을 홍보하는 마케팅걸인 "그녀가 받은 지시는/ 회사가 만든 전기밥솥으로 지은 밥맛과/ 오래전 가마솥으로 지은 밥맛이 같다는 것을/ 고객들이 알게 하는 일이었다"(마케팅 에피소드-맛 마케팅)처럼.

대합실 불빛은 멀리 비치지 않았다
어둑한 구석 바닥에 둘러앉은 다른 무리는 지쳤는지
어떤 사내는 소주를 병째로 들이켜고
또 어떤 사내는 소주병을 잡은 채로 졸고
또 어떤 사내는 소주 한 잔 하고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서로 무얼 했느냐고 전직을 묻지 않는다
서로 어디서 살았냐고 고향을 묻지 않는다
서로 처자식이 있느냐고 더욱 묻지 않는다
차도에서는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가고
빌딩 옥상 전광판에는 광고 자막이 번쩍거렸다

-84쪽, '역전' 몇 토막


시인 하종오가 물질자본주의의 아이러니한 속내와 그로 인해 빚어지는 우리 사회의 모순을 꼬집어내는 시는 이 시집 곳곳에 날선 비수처럼 꽂혀 있다. "직원의 눈빛과 고객의 눈빛이 같아지는 순간/ 잘 팔리는 상품이 되고"(마케팅 에피소드-디스플레이)나, "무료급식차가 오니 맨 앞줄에 선 세 지방 남자는/ 자신들의 체온이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밥이 아닐까"(세 사내)란 시도 마찬가지다.

시인 하종오의 시는 물질자본주의가 낳은 우리 사회의 모순과 그 모순이 피워낸 그늘진 구석을 골고루 비추는 거울이다. 시인은 그 거울을 들고 마치 동화 <백설공주>에 나오는 계모가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기업과 소비자의 욕구의 뿌리를 속속들이 파헤친다.

그 욕구의 뿌리 주변에는 물질자본주의 세상에서 밀려나 역전에서 어슬렁거리며 깡소주를 마시는 무리들도 있고, 시대에 뒤처져 죽어라 땅만 파며 살아가는 어미들도 있다. 그리고 "밥 먹자/ 이 방에 대고 저 방에 대고/ 아내가 소리치니/ 바깥에 어스름이 내"리는 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따분한 하루도 들어 있다.

시인 권혁웅은 이 시집의 해설에서 "하종오는 여전히 처음의 자리에 있으며, 그것도 풍자와 반성이 서로를 부정해야 하는 곤고하고 당혹스런 자리에 있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이번 시집에서 "하종오 시인이 선보인 부정 변증의 방법론은 삶과 사람에 대한 간절함에서 나온 것"이라고 평했다.

물질자본주의의 속내를 파헤치는 시인
시인 하종오는 누구인가?

▲ 시인 하종오
ⓒ랜덤하우스중앙
"하종오의 이번 시집은 집요하게 도시 혹은 도시인의 '마케팅적 삶'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도시에서 자연은 '어머니의 이미지'로 가공된 상품에 불과하다. 그런 반면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시 변두리는 '지옥처럼 낯선' 것이 된다. 하종오의 시적 미학에 있어 그 탁월함은 이 지옥을 자신의 운명으로 창조하는 데 있다. " -박형준(시인)

시인 하종오는 1954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1975년 <현대문학>에 시 '허수아비의 꿈' '사미인곡' 등을 밮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사월에서 오월로><분단동이 아비들하고 통일동이 아들들하고><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쥐똥나무 울타리><사물의 운명><무언가 찾아올 적엔> <반대쪽 천국>이 있다.

굿시집 <넋이야 넋이로다>, 님 연작시집 <님 시편><님><님 시집>을 펴냈으며, 1983년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다. <반시>(反詩) 동인.

/ 이종찬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 <씨앤비> <시민의 신문> <시골아이>에도 보냅니다.


지옥처럼 낯선

하종오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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