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오후 3시 장맛비를 머금은 하늘을 보다가, 뒤늦게 용기를 내 짐을 꾸렸습니다. 서울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경기 북부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양수대교에 못 미쳐 내렸습니다.
남양주시 조안면 진중삼거리. 멀리 산중턱 움푹 들어간 곳이 수종사로 보입니다. 그 방향으로 무작정 발길이 갑니다. 얼마쯤 가니 철길 건널목이 막아섭니다. 부드러운 침목(枕木)을 밟았습니다. 건널목을 건너 한참 걸어서야 운길산 입구에 당도합니다.
오후 5시. 하지(夏至)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유월의 밤꽃이 산길에 흩뿌려진 걸 보니, 어느 새 계절이 지나는 게 보입니다. 첫 산행이라 다른 길은 모릅니다. 구불구불 이어진 가파른 산길 도로를 따라 30여 분, 산 중턱에 다다릅니다.
오른편으로 수종사를 가리키고, 왼편으로 정상을 가리키는 팻말이 보입니다. 산꼭대기를 먼저 보기로 했습니다. 나무 계단과 쇠줄로 안내하는 등산로는 사람 냄새를 많이 풍겨, 그리 반갑지는 않았습니다. 30여 분 오르니 운길산 정상입니다. 산 위 하늘은 온통 구름 떼. 구름이 멈춰선 곳이라는 지명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굽이굽이 이어진 산세를 보다가 하산하기로 했습니다. 하산길은 수종사로 가는 길입니다.
너른 마당에 펼쳐진 '두물머리'
산사로 가는 길은 바람의 연속입니다. 줄지어 늘어선 돌탑들이 기도 도량이라고 알립니다. 그 돌탑을 좇아 산사 들머리에 다다릅니다. 먼저 보이는 것이 약수터. 산사를 찾는 이들에게 조심하라는 듯 말하는 묵언(黙言) 팻말. 이 단어로 범인(凡人)이 호기심에 찾은 곳은 구도자들의 공간임을 직감합니다.
경내로 발을 옮기자마자 어디서 종소리가 울립니다. 저녁 예불을 알리는 소리일까요. 종소리가 나는 곳으로 갔습니다. 턱수염이 텁수룩하게 난 스님 한 분이 절도 있게 종을 칩니다. 몇 번 울렸는지 세지 않았지만, 그 진동은 경내를 구석구석 흔들어 깨웁니다. 그 종각 옆에 너른 마당이 있습니다. 마치 여행자를 기다렸다는 듯 두물머리 풍경이 펼쳐집니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몰려 있어도,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진 강물은 유유히 흘러갑니다. 이 풍광 앞에서 잠시라도 구도자의 마음을 간직하라고 말하는 거겠지요. 부부사이로 보이는 여행자가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그렇겠지요. 풍광에 한참동안 빠져 있다가 경내에 있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 너른 마당 옆에 '삼정헌'이 있습니다. 산사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차를 내어주는 곳이지요. 저녁 7시가 다 된 시각이라 문은 닫혀져 있습니다. 경내 입구에서 마신 물맛을 떠올리며 짐짓 아쉬운 마음을 달래봅니다.
"수종사는 천년의 향기를 품고 아름다운 종소리를 온 누리에 울리며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수종사는 신라 때 지은 고사인데 절에는 샘이 있어 돌 틈으로 흘러나와 땅에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낸다."
다산 선생이 예찬하는 수종사는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선사, 추사 김정희가 차를 즐겨 마셨던 곳입니다. 그래서 수종사 물맛과 차 맛은 천하일품이라고 말합니다.
지친 마음 내려놓는 산사일 뿐
경내는 그리 넓지 않지만 아담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대웅전, 경학원, 종각, 산신각, 종무소 등등. 한 여행자가 대웅전 앞에서 기도를 드립니다. 어떤 명성을 간직한 수종사라고 하더라도 기도 도량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산사는 지친 마음을 내려놓는 곳일 뿐입니다. 굳이 불교를 내세우지 않아도, 민중들이 기복을 비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장마철이 지나면 땡볕이 찾아듭니다. 한잔 차 맛, 한잔 물이 그리운 때 입니다. "한잔의 차 한 조각 마음에서 나왔으니, 한 조각 마음 한잔에 담겼네. 이 차 한잔 맛보시게, 한번 맛보면 한량없는 즐거움이 생긴다네." 함허 스님의 차가(茶歌)가 어울리는 수종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