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 날을 세워야 할 한나라당이 오히려 궁지에 몰리고 있다.
초대형 급식사태가 터졌다. 정부와 여당으로선 악재가 아닐 수 없다. 국민 건강, 그것도 우리 아이들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CJ푸드시스템을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못한 결과다.
지적도 여러 갈래로 나왔다. 식품의약품안전청과 시도 교육청이 지난 3월 합동으로 위탁급식업체를 점검할 때 CJ푸드시스템은 '열외' 대우를 받은 사실이 공개됐다. 2003년부터 올해까지 노로 바이러스를 비롯한 전염성 바이러스로 학교에서 발생한 식중독 사고가 26건이나 되는데도 식품위생법 시행규칙상의 식중독균 검출기준에 바이러스가 빠져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십개 학교에서 식중독이 발생했는데도 교육청은 늑장 대응을 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 정도면 정부여당은 고개를 숙여야 한다. 각도는 물론 90도다. 그런데도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다. 삿대질도 하고 있다. 한나라당을 향해 '너희들 때문'이라고 목청을 돋우고 있다.
[열린우리당] '민생법안'은 처리하면서 급식법은 왜 썩혔나
무슨 까닭인가? 사학법 때문이다.
국회에 계류 중인 급식 관련 법안은 6개, 하지만 모두 먼지를 쓰고 있다. 최장 2년째 썩고 있는 법안도 있다.
급식 관련 법안을 다루는 상임위는 교육위원회, 하지만 이 곳은 사학법 전투장이다. 그래서 급식 관련 법안은 처리되지 못하고 있다. 고로 초대형 급식사태의 책임은 한나라당에 있다는 것이다.
한명숙 총리가 그렇게 말했고,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똑같이 주장했다. 한명숙 총리는 "한나라당의 사학법 연동 처리 의도 때문에 급식 관련법 등 개혁법안이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근태 의장은 "학교급식법을 비롯해 시급한 민생현안이 쌓여있다, 더 이상 국회가 민생을 외면한다는 비판과 지적을 받지 않기를 바란다"고 공격했다.
그럴까? 아니다. 근거가 부족하다. 한나라당 김영숙 의원이 급식 관련 법안을 제출한 시점은 2년 전인 2004년 6월, 또 정부가 법안을 제출한 시점도 비슷하다. 반면 한나라당이 사학법 문제를 다른 법안과 연계하기 시작한 시점은 지난해 말이다. 따라서 선후관계가 잘못돼 있다.
더 크고 근본적인 허점이 있다. 급식 관련 법안만 통과됐다면 이번과 같은 초대형 급식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세세한 근거를 댈 필요도 없다. 이런 식의 법률 만능주의로는 식품 위생 관련 법안이 즐비한데도 식품안전사건이 빈발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법안 못잖게 중요한 것은 당국의 관리감독이다. 바이러스에 의한 식중독균 검출기준이 왜 없느냐는 한나라당 전재희 의원의 질문에 당국은 "검사가 쉽지 않아서"라고 답했다. 현재로선 잡아낼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상황이 이렇다면 급식 관련 법안을 6개가 아니라 60개를 만들어도 어차피 막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럴수록 위생 점검을 강화했어야 할 텐데 어찌된 일인지 CJ푸드시스템에 대한 위생 점검을 하지 않았다. 이건 법 이전의 문제요, 법과는 별개의 문제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지난해 말과 올 4월말에 한나라당의 사학법 개정 요구를 일축하고 이른바 '민생법안'을 일괄 처리할 때 여당은 급식 관련 법안을 처리 대상에 올려놓지 않았다. 여당 또한 급식 관련 법안에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는 얘기다. 정부와 여당의 '사학법 타령'은 그래서 정치적이다. 전형적인 '네 탓이오' 행태다.
[한나라당] 재단 경영권 지키느라 학생 건강권 놓쳤다
오해하지는 말자. 그렇다고 해서 한나라당이 잘했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한나라당이 지난해 말 사학법 장외투쟁을 전개할 때 첫번째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게 '우리아이 지키기'였다. 그래서 무슨 운동본부인가 하는 것도 만들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 이른바 이념과 구국에 매달리다가 정작 가장 기본이 되는 건강을 지켜내지 못했다. 학교 재단의 경영권을 지켜주려다가 학생의 건강권을 팽개쳤다.
지나간 얘기라 치자. 지금만 따지자. 바뀐 건 하나도 없다. 한나라당은 여전히 '사학법 타령'을 하고 있다. 사학법 개정을 다른 법안과 연계하겠다고 한다.
무엇을 우려하는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사학법과 다른 법안을 연계하겠다고 호언장담한 상태에서 급식 관련 법안을 빼내면 두름이 느슨해진다. 이번 임시국회에서 처리 되지 않으면 실행일정표가 어그러지는 로스쿨 관련법을 비롯해 '시급한' 민생법안을 보이콧할 명분을 잃게 된다. 말 그대로 '한 번 밀리면 끝장'이 될 수도 있다.
사정은 알겠지만 공감은 할 수 없다. 중요한 건 국민의 가슴이다. '도대체 사학법이 뭐길래'라는 비판 정서가 널리 공유되는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사학법에 목을 매는 것은 자해행위와 같다. 더 나아가 다른 민생법안과 연계하는 건 자살행위에 비견될 수 있다.
실정을 하기는 피차일반이다. 누가 더 크게 실정했는지, 누구의 실정이 더 커보이는지의 차이만 있을 뿐 국민과 따로 놀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이유는 다르지만 여야 모두 날새는 줄 모르고 '사학법 타령'을 하고 있다.
양비론도 가끔은 필요하다. 바로 이런 경우가 그 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