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동하는 야구선수 이승엽의 경기를 보러 도쿄돔에 갔다. 일본 여행은, 아니 도쿄 근교 여행은 이것으로 두번째다.
신주쿠·시부야·하라주쿠·오다이바 등 도쿄 시내 정도만 돌아다니면서 일본의 대중문화 탐방을 한 것은 작년의 일.
그때는 동행인 여행객 대부분이 일본의 대중문화들 즉 만화책·애니메이션·영화·음악·게임 등에 심취한 십대의 청소년들이어서 소위 '오타쿠'들이 갈만한 곳들만 찾아다녔다. 만화가게·음반판매장·지브리 스튜디오·방송국·자동차 전시장·조립 로봇 전시장 등등.
예정에 없다가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이번 일본 여행의 동행자들은 그때의 구성원들과 성향이나 취향이 굉장히 달랐는데, 유독 스포츠에만 관심을 쏟는 대학 새내기들과 함께였다.
여행시기 또한 바로 며칠 전으로 월드컵 경기가 한창 무르익다 못해 폭발 직전이었고, 한국에서도 중계해주는 바람에 알 수 있었던 것처럼 이승엽은 자랑스럽게도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중에서 최다 홈런으로 줄곧 1위를 달리고 있는 시점이었다.
도쿄 돔에서의 한국어 응원 "이승엽 이겨라"
일본 소설이나 영화와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살고 있던 나로선 처음의 일본 여행은 그야말로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었고, 그러다보니 여행 자체가 즐겁기 한량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야구나 축구같은 스포츠에는 그다지 큰 관심도 없고 경기 룰이나 선수들 개개인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별로 없는 나로선 '도쿄 돔에서의 야구경기 관람'은 꿈에서조차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일본 여행은 동행자들이 미리 세심하게 계획하면서 꾸린 여행이었고 나야말로 엉겁결에 동행을 결정한 처지였기에 쓰다 달다 말할 계제가 아니었다.
또 말로는 별 관심이 없다손 쳐도 여행 자체와 스포츠 구경을 하는 것은 마다할 일이 전혀 아니어서 일본 여행과 야구경기장 방문은 설레는 일이었다. 심지어 야구경기구경은 꽤 비싼 편이었고 내가 산 티켓도 아니었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20대 초에 한번 가본 야구경기장 방문과 야구 경기구경을 20년 만에 일본에서 하게 됐다.
신주쿠에서 JR선을 타고 도착한 도쿄돔은 일단 크기로 압도해왔다. 인산인해를 이룬 경기장 입구를 지나 당연히 우리 일행은 이승엽이 속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응원하러 들어섰다. 그 큰 경기장의 응원석은 이미 꽉 차 있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 경기여서 몇 개 남은 맨 꼭대기 좌석에 간신히 앉고보니 응원석은 주황빛 요미우리 팀의 수건으로 넘실거리는 거대한 파도였다.
경기장에 들어서기에 앞서 가방을 열어보이는 검사를 당했다. 경기장 폭력을 염려해서 플라스틱 물병까지 프런트에 맡기기를 권했고, 도시락에서 술 한 잔 마시는 컵까지 모두 스티로폼이나 종이 외엔 소지 자체가 불가능했다.
입구 매장에서 산 일본 도시락을 사가지고 자리를 잡았다. 일본인들이 가득한 틈 속에서 한국인 우리 일행 네 명은 자랑스럽게 33번 이승엽을 찾아 응원하기 시작했다.
일본 사람들은 일본 말로 열심히 팀 선수를 응원하다가도 이승엽이 타석에 서면 똑똑한 한국어 발음으로 "이승엽 이겨라"를 연호했다. 듣기만 해도 흐뭇한 일이었음은 물론이다.
이승엽이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응원하고 있었지만, 그 날의 경기는 상대팀 '동북낙천(東北樂天 도호쿠 라쿠텐)'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이승엽도 경기가 반이나 넘어가도록 홈런을 치지 못했고 날은 더운 데다가 습도가 높았고 응원 열기까지 겹쳐 목이 상당히 말랐다.
그때서야 맥주나 한 잔 해볼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고 그러다보니 도쿄돔의 응원석을 하염없이 오르내리며 맥주를 파는 아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사히·기린 등의 맥주를 파는 아가씨들은 각 회사의 유니폼을 입고 등에 맥주가 든 커다란 통을 메고 응원석을 헤치며 다니다가 손님이 맥주를 주문하면 기다란 종이컵을 꺼내 호스를 대고 맥주 집에서 생맥주를 퍼내듯이 맥주를 뿜어 내주었다.
종이컵 한 잔에 800엔. 우리 돈으로 거의 8000원 정도. 땅콩이나 김말이 과자 등의 안주를 넣은 종이봉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함께 팔고 있었다.
무거운 맥주통, 남성이 메고다니면 좋을텐데
맥주를 사기 전에 사람들이 지나가는 맥주 아가씨를 불러 술을 주문하고 맥주를 파는 모양을 눈여겨 바라보았다. 우리 일행이 앉아 있던 곳은 도쿄돔 응원석의 거의 맨 끝자리에다 3층 구석이었다.
그녀들은 맥주통을 메고 계단으로 이어진 가파른 응원석의 거의 끝까지 수십번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는데, 한참을 눈여겨보니 한결같이 아가씨들의 체구가 너무나 가녀리고 말라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얼굴도 작고 예뻤다. 완벽하게 가늠할 수 없어 확신할 순 없지만 20대를 넘어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응원석 한 통로에 서너명씩 연이어 왔다갔다 하고 있었으니 응원석 전체를 둘러보면 수십명이나 될 맥주아가씨들이 한결같이 젊고 예쁘고 불쌍해 보일 정도(?)로 날씬하다는 게 신기했다.
등에 맨 맥주 통은 그 가녀린 등에 버거워 보일 정도로 크고 무거워 보이는데다가 듬직해 보일 만큼의 살집도 없는 어린 여자들이 하필이면 계단으로 이루어진 가파른 꼭대기를 헤집고 다니는 모양은 사실, 조금 안쓰러워 보였다.
스포츠 경기라는 것이 몇 개를 제외하곤 거의가 남성들이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구경을 하러 오는 사람도 거의가 남성들이다(여자가 스포츠를 안 한다거나, 여자가 스포츠 구경을 안 한다는 것이 아니다).
남성들은 스포츠로 몸을 단련하고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또 다른 남성들은 회사가 끝나면 지친 몸을 이끌고 경기장으로 와서 응원을 하고 경기를 보고 이기면 대리만족하게 된다.
여하튼 아직 스포츠 경기장이란 공간은 월등하게 남성들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의 여성들도 스포츠와 그 구경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즐기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아직은 경기장은 남성들의 해방구인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경기장 자체가 남성들의 공간이란 사실. 저기 저 앞에선 남성들이 구르고 뛰고 달린다. 여기선 남성들이 앉아 소리지르며 열띤 응원을 한다.
80~90 퍼센트가 남성들인 공간에서 여성이 일하고 놀 수 있으려면 그들 남성들의 어떤 욕구에 부응할 수 있는 구석이 있어야 할 것은 자명하다. 맥주를 판다는 것(보는 즐거움을 배가하기 위해), 그 맥주를 어리고 예쁘고 날씬한 여성들이 파는 것(금상첨화!!). 맥주 회사들은 그래서 맥주를 파는 사람들을 뽑을 때, 이런 여성들만을 골라 뽑았을 것이다.
남성들의 공간에서 살아남는 여성들은
무거운 맥주통도 남성들이 메고 다니면 더 편해보일 것 같고, 가파른 계단도 건강한 남성이, 그게 아니라면 좀 튼튼하고 살집도 있는 여성이 한다면 보기에도 좋고 효율적일 것 같은데, 그건 마케팅이나 홍보·판매의 법칙을 모르는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일의 귀천이나 중요도는 아무 상관없다.)
나는 응원석의 이쪽 저쪽으로 눈을 돌려 살펴보았다. 유니폼을 입은 그녀들은 응원석 속에서 금방이라도 식별할 수 있게 도드라져 보였다. 깊고 높은 산 속을 등정하는 산사람이나 무거운 짐을 지고 묵묵히 따라가는 세르파들처럼 보였다. 응원석의 검고 흐린 사람들의 숲 속에서 점점이 박혀 일하는 그녀들의 연두빛과 붉은 빛 유니폼이 움직이는 모습은 왠지 고독하고도 힘겹게도 보였다.
목도 말랐지만, 그녀들의 마른 등에 얹힌 맥주통의 무게라도 좀 줄여볼 요량으로 맥주를 시켰다. 때마침 그때쯤 이승엽은 솔로 홈런을 치고 홈으로 들어왔다. 모든 요미우리 자이언츠 팀의 응원석의 사람들이 큰 함성과 함께 파도처럼 요동쳤고 아가씨를 불러 맥주 한잔을 주문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운동장의 흙을 고르고 선수들이 잠깐 쉬는 사이에, 치어걸들이 한 무리 마구 달려나와 춤을 추며 흥을 돋구어 주었다. 물론 그녀들도 어리고 예쁘고 날씬하고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고 얼굴에는 절대 미소를 잃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