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의 <온 더 로드> 표지엔 앞으로 길게 뻗은 황톳길이 나온다. 금방이라도 뽀얀 먼지를 내뿜을 것 같은 노란 길 오른쪽에선 큰 물소 두 마리와 아기 소 두 마리가 땅에 머리를 박고 먹는 듯 쉬는 듯, 선 듯 가는 듯하고 있다. 길 왼쪽엔 외떨어진 아기 소 한 마리가 오른쪽 네 마리와는 약간 어긋난 쪽으로 걷고 있다.
파란 하늘밑에 열대림이 가로로 길고 얇고 멀게 펼쳐져 있고 농가라고 보기엔 제법 큰, 마치 사육장 같은 건축물이 오도카니 서 있다.
<온 더 로드>의 부제는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그런데 표지엔 사람이 없다. 소가 있으면 목동이 있음직하고 집이 있으면 호구 마련에 바쁠 어른은 그늘막에서 땀을 흘릴지언정 한가한 어린애들은 나와 놀만 한데, <온 더 로드> 표지엔 사람이 없다.
표지의 노란길이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아래 음악이 찢어질 듯 터져 쏟아지고 노천카페, 레스토랑, 여행사, 책방, 쉼터가 즐비하고, 갓 여행을 나선 초보자부터 몇 년씩 여행 중인 숙련자까지 크고 작은 배낭을 이고 메고 모여드는 카오산으로 가는 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이 없는 물소가 선 듯 가는 듯 하는 인적 없는 황톳길은 <온 더 로드 : 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이라는 제목과 제법 어울린다.
버리고, 버리고 잊고, 잊어버려야 하지만…
여행에 관한 책은 떠날 수 없어 '남겨진 사람'에겐 형벌이다. 언젠가 떠날 수 있다는 기대,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만난다는 설렘, 더 밝은 하늘과 짙은 향기를 내뿜는 대지가 주는 기쁨을 만끽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직도 떠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좌절, 떠날 수 있는 자들에 대한 질투, 배부른 남을 바라보는 배고픈 자의 시기가 얽히고설켜 괜한 괴로움만 는다.
<온 더 로드>의 주인공처럼 나도 떠날 수 있다. 이것 팔고 저것 해지하고 요것 찾으면 수년은 힘들겠지만 수개월은 떠날 수 있다. 머리는 짧지만 오색실 붙이면 레게머리를 할 수 있고, 초록색 두건으로 세월이 훌쩍 넓혀놓은 이마를 가릴 수 있고, 비닐봉지에 한껏 담은 열대과일 음료를 홀짝거리고, 흔적만 남은 이두박근에 '착하게 살자'라는 타투를 그려 넣을 수 있다.
나도 맘만 먹으면 큼직한 등짐 지고 두툼한 봇짐 안고 체 게바라가 담배 피우는 티셔츠를 입고 헐렁한 반바지에 먼지가 뽀얗게 쌓인 샌들을 끌고 노천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홀짝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난 버리고 가기엔 아까운 것이 너무 많다. 5수 끝에 겨우 잡은 직장은 하루아침에 털어내기엔 미련이 너무 많고, 결혼 10년 만에 이곳저곳 손 벌려 마련한 집은 아직 갚아야 할 대출금도 많이 남아 있다. 내일 회의를 위해 오늘 밤 준비해야 할 자료가 너무 많고 친목, 동창, 운동, 동호회 등 나가야 할 모임도 많다.
버릴 수 없는 게 너무 많은 난 버리고 떠난 <온 더 로드>의 사람들이 무지하게 얄밉다. 그래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노랫말 때문에 '이렇게 살면 안 되지'하며 훌쩍 떠나는 걸 보며, 김광석보다 송대관의 '해뜰 날'의 노랫말이 인생살이에 더 힘이 된다고 우긴다.
"만날 매끼 볶음밥만 먹지만 학교 안 가고 노는 게 얼마나 좋은데"라는 고등학생에게 우리 애들은 "두 끼 이상 같은 메뉴는 안 먹어, 학교 안 가서 좋다고? 쯧!"이라고 답한다. 큰애는 저번에 놓친 상장을 이번엔 꼭 받을 수 있다며 오밤중까지 학원에 다닌다. 물론 늘 행복하지 않겠지만 오늘이 쓴 만큼 내일은 분명 달콤할 거라 확신한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공간이 한 뼘 정도라면 여행은 두 뼘, 세 뼘 만하게 넓혀준다"는 30대 커리어우먼에겐 "집 평수라면 몰라도 인생 평수를 겨우 한두 뼘 넓히려고 제 돈 써가며 생고생하느냐"고 비웃고, "내가 왜 떠돌아다니는지 모르겠어"라는 20대 벨기에 남자의 말을 "그럼, 돌아가"라고 단호하게 자른다.
"하루 여행을 마치면 하루만큼 더 행복해진다"는 30세 독일 여성에게 "하루 야근하면 주말에 애들하고 돼지갈비를 실컷 먹을 수 있지"라며 뿌듯해한다. 결혼 2년차에 10년간 다닌 건축회사와 공무원을 때려치우고 모은 돈 탈탈 털어 세계여행길에 오른 30대 초반의 부부가 여정이 막바지에 들자 "돌아가면 뭘 해야 하나" 걱정한다는 말에 "그러게, 돌아올 자리는 보전해 놓고 가야지"하며 앞뒤 꼼꼼히 재며 사는 내가 헛살지는 않는구나 위로한다.
"왜 꿈만 꾸는가, 한번은 떠나야 한다"
충고하고 뿌듯해하고 동정하고 위로하고… 행복한 얼굴엔 고민의 흔적이 덕지덕지 남아 있고, 즐거워하는 몸짓엔 방황의 그림자가 짙은 카오산 로드의 배낭족에 비해 별로 꿀리지 않는데 <온 더 로드>의 표지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왜 가슴 한켠, 아니 모든 켠에 소슬바람이 부는 걸까.
"왜 꿈만 꾸는가 / 한번은 떠나야 한다 / 떠나는 건 일상을 버리는 게 아니다 / 돌아와 더 잘 살기 위해서다"
온 가슴이 시릴 만큼 작가의 말은 고즈넉한 밤하늘에 선명히 반짝이는 별이 되어 마음을 찌른다. 여행은 위험한 낭만이다. 특히 나 같은 봉급쟁이에게 장기여행은 치명적인 모험이다.
그동안 피땀 흘려 모은 거의 전부를 놓고, 아니 버리고 떠나야 한다. 여행의 대가가 아무리 값지다 하더라도 버린 것보다 반드시 클 거란 보장이 없다.
순간의 행복은 잠시 추억으로나 빛을 낼 뿐 매 순간 나를 옥죄는 현실에서 대단한 힘을 발휘할 것 같진 않다. 물론 무언가에 속은 마음을 다독거려 본래의 순한 마음으로 되돌려놓는 명상의 시간은 분명 가치 있다. 하지만 난 선방의 수도승이 아니다. 회사에 들어서는 순간 남의 것이 되어버리는 얄팍한 마음을 여행이 계속 온전하게 지켜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래서 "떠나는 건 일상을 버리는 게 아니다, 돌아와 더 잘 살기 위해서다"라는 작가의 말이 붙은 책상머리만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다. 물론 희망은 있다. 나도 맘만 먹으면 떨치고 일어설 수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다, 누구나… 그러나 아무나 하지는 못한다.
표지의 황톳길 왼쪽으로 혼자 걸어가는 어린 소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힌다. 일상에서 조금만 떨어져 가만가만 걸어 보았으면, 혼자보다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서 보았으면. 카오산의 <온 더 로드>가 날 텅 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