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문은 종로구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위치하고 있으며, 본래 청운동 일대에는 골이 깊고 물과 돌이 맑고 아름다워 개성의 자하동과 같다고 하여 자핫골이라 하였고, 창의문은 바로 이곳에 있어 다른 말로 자하문이라고도 불리웠다.
창의문은 서울 도성의 4소문 가운데 하나이며,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백악)의 서쪽 날개 부분에 해당되는데, 태조 5년인 1396년에 서울의 성곽과 4대문, 4소문이 건립되었을 때 함께 건립되었다. 태종 13년인 1413년에는 풍수학생 최양선이 백악산의 동쪽 고개와 서쪽 고개는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된다는 상소를 올려 동쪽 고개에 있는 숙청문 (숙정문) 과 이곳 창의문을 한때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하기도 했다.
이후 세종 28년인 1446년에 창의문에 대한 출입 통제가 어느 정도 풀려 왕명을 받아 출입하는 이외에 항상 닫고 열지 않도록 하였으나, 중종반정이 일어난 1506년 9월 2일에 혜화문과 창의문을 닫으라는 명을 내린 것을 보면 항상 닫아 두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도성안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창의문은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같은 양식의 축대를 조그만 규격으로 쌓고 그 위에 단층 문루를 세웠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구성된 이 목재 문루는 견실하고 정교하며 홍예 또한 아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청와대길을 따라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길을 따라가면 우측에 1·21사태(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 사건)시 이 곳에서 순직한 고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이 눈에 보이게 된다. 그곳에서 북악산길 산책로라는 길을 따라서 50여 미터만 가면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던 창의문이 모습을 보인다.
창의문으로 오르는 길은 산책로처럼 잘 만들어 놓았지만 여기저기 과자봉지며 담배꽁초들이 어지럽혀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창의문 아래에 도착하자 산책을 하러 온 사람들과 창의문을 통과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매우 한적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사람들이 흡연을 하는 모습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것도 목조문화재인 창의문 아래에서 말이다. 주위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은 당당히 담배를 피우고선 사라져버렸다. 얼마 전 수원 화성의 화재 사건을 떠올리는 순간이다. 그뿐만이 아니였다. 창의문 곳곳에는 사람들이 피우고 버린 담배 꽁초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였다. 사람들의 안전불감증이 이곳에도 있었다.
그럼 창의문의 소방시설은 잘 되어 있을까? 아니였다. 창의문에 설치되어 있는 소방시설은 누각 안의 소화기 한 대가 고작이었다. 그것마저도 누각 안에 있어 불이 나게되면 꺼내기가 힘들어 보였다. 군인들의 초소가 바로 옆에 있어 불이 나게 되면 바로 알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초기 진화에 필요한 소화기는 있어야 하겠다.
청와대 근처에 있어서인지 창의문의 보존 상태는 잘 되어 있었지만 사람들의 부주의가 걱정되었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을 버리고 모두가 문화재를 보호하는 시민의식을 가져야 하겠다.
덧붙이는 글 | 이수앙 기자는 cpn문화재방송국 소속이며, 이 기사는 iMBC에 동시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