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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연습> 책 겉표지.
<인간연습> 책 겉표지. ⓒ 실천문학사
수년 전, 한 친구의 결혼식 때의 일이다. 결혼식 주례하면 통상 신랑신부의 은사이거나, 은사가 안 되면 화려한 경력의 언변 좋은 직업주례사가 하기 마련이었지만 친구부부는 그와는 전혀 거리가 먼 분에게 주례를 부탁하였다.

그분은 다름 아닌 결혼도 못해 본 최장기수 김선명 선생이었다. 남쪽의 한 콘도에서 치러진 그 결혼식은 '도떼기시장' 같았던 내 결혼식과는 달리 시종 엄숙하게 진행되었기에 결혼식이 끝난 후 저마다 이구동성으로 '모처럼 결혼식다운 결혼식'을 보았다는 소감들을 피력하였었다.

그분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모르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지만 사람들은 뭐에 홀린 듯 조용히 선생의 주례사를 경청하였다. 선생은 수 일 동안 고쳐 쓰고 고쳐 썼을 주례사를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읽으셨다. 선생의 물리적 나이는 일흔 할아버지였지만 우리네 눈에는 수줍은 스무 살 청년의 모습으로만 보였다.

아니, 저분이 정녕 그분이란 말인가. 대한민국은 무엇이 무서워서 저런 소년 같은 분을 44년씩이나 독방에 가두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전향자는 배반자?

조정래 선생의 <인간 연습>(실천문학사)은 위의 김선명 선생처럼 평생을 감옥에서 보낸 두 장기수 할아버지의 이야기이다.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김선명 선생의 경우는 끝까지 미 전향으로 남았기에 스스로 자책할 고통은 없었으나 이 책의 주인공들은 그렇지가 못했다.

"자발적으로 전향을 한 것은 더 말할 것 없고, 강제로 전향을 당했더라도 일단 전향 서에 손도장을 누른 자들은 사상의 변절자였고, 혁명의 배반자였다. 전향 전에 죽은 자들은 혁명의 영웅이었고, 끝끝내 탄압을 이겨낸 비전향자들은 혁명의 승자였고,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전향을 한 자들은 혁명의 패배자였다. 변절자, 배반자, 패배자 들을 상대해줄 대상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50~51쪽)

박동건은 쓰러져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자신의 전향은 자기 의지가 아닌 강제였음을 증명 받고 싶어 하였다. 30년 모진 고문의 옥살이를 하고도 마지막에 강제로 찍힌 전향서 한 장 때문에 그들의 양심은 괴로워하였다. 거기다 사상의 조국, 구소련의 몰락은 그들에게 '헛 산 것'일지도 모른다는 절망마저 안겨주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며, '이성의 힘에 의해 탄생한 마르크시즘은 그 이상세계를 반드시 실현시킬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평생'을 살았으나…, 인간의 이성은 '본능'을 이길 수 없었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책 속 출판사 사장의 말마따나 '사회주의에 안 먹히려고' 사회주의의 장점을 기를 쓰고 충실히 실천하였을 뿐이었다.

마지막에 희망을 그린 것은...

이 책에서 조정래 선생은 박동건은 절망 속에 보냈지만 윤혁의 삶은 필요 이상으로 현실과 동떨어지게 이상적으로 그렸는데 어쩌면 그것은 선생의 희망사항은 아니었을까.

(지금 이순간은 또다시 냉기류가 흐르지만) 한동안 남북 화해무드를 타고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경우 희망자에 한해 꿈에 그리던 북한 땅을 밟게 되었다. 그러나 과연 수십 년 감옥에서 꿈꾼 대로 북한 땅은 행복의 나라였을까.

북송된 분들의 속사정은 알 수 없지만 연고 없이 남한에 남은 분들은 확실히 불행하였다. 다달이 약값과 생활비에 허덕여야 됨은 물론이고, 감옥살이 수십 년에 세상살이도 서툴뿐더러 아픈 몸이나마 어디 써먹고 싶어도 주어질 일자리가 없었다.

그에 비해 소설 속 윤혁의 삶은 술술 잘도 풀렸다. 왕년의 실력으로 책을 간간히 번역하기도 하였고 부모 없는 어린남매의 후견인 노릇도 하게 되었다. 뿐인가 자전에세이는 대박 날 조짐이 보였고 그 책을 보고 감동한 보육원 원장은 여생을 보낼 거처마저 마련해 주었다.

사실성을 기초로 한 역사소설의 대가가 사실과 동떨어진 그와 같은 결론을 내린 것은 이분들의 삶이 뒤늦게나마 그렇게 '안착'되기를 바라는 소망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읽었다.

두 번씩이나 민주화에 몸 바친 사람이 대통령이 됨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군사독재 시절과 같은 장기수 할아버지들은 없을 것이라고 자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0.7평 감옥에서는 해방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분들은 여전히 감옥에 계신지도 모르겠다. 보다 넓은 감옥에, 남들은 감옥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사실은 감옥이나 다를 바 없는 현실을 살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인간 연습

조정래 지음, 실천문학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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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라는 말이 좋습니다. 이 순간 그 순간 어느 순간 혹은 매 순간 순간들.... 문득 떠올릴 때마다 그리움이 묻어나는, 그런 순간을 살고 싶습니다. # 저서 <당신이라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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