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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가 넘어서 끝난 일본인 참가자들의 합평회를 마친 뒤 촬영. 왼쪽부터 인병선 짚풀생활사박물관장, 일본 야스쿠니 반대 운동의 중심축인 서승 교수, 하토리 료이치씨. 하토리씨는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참배 위헌 판결을 이끌어 낸 일본 소송단 대표.
밤 11시가 넘어서 끝난 일본인 참가자들의 합평회를 마친 뒤 촬영. 왼쪽부터 인병선 짚풀생활사박물관장, 일본 야스쿠니 반대 운동의 중심축인 서승 교수, 하토리 료이치씨. 하토리씨는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참배 위헌 판결을 이끌어 낸 일본 소송단 대표. ⓒ 김기
일본 패망 61주년을 앞두고 뜨거운 국제 문제로 다시 떠오른 야스쿠니 신사와 관련해, 지난 20, 21일 이틀간 서울 명동 전국은행연합회관 2층 국제회의장에서 '야스쿠니 반대 공동행동 한국위원회' 등에서 주관한 국제심포지엄이 열렸다. 야스쿠니와 관련해 최초로 열린 이 심포지엄은 이 문제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새로운 운동의 장을 기약했다.

한국 언론의 무관심 속에 심포지엄이 열리는 동안, 2차 대전의 A급 전범들이 야스쿠니에 합사됐다는 사실을 불쾌하게 여겼다는 전 일왕 히로히토의 메모가 발견돼 언론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러나 심포지엄에 참석한 학자들은 이 또한 일왕의 이미지를 교묘하게 조작하는 것일 가능성도 있다며 경계했다.

심포지엄에는 야스쿠니 및 일본의 전쟁책임에 관심이 많은 일본인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심포지엄 외에도 서대문 형무소 등 일제 당시 유적지도 방문했다.

심포지엄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날인 22일 밤, 일본인 참석자 중 일부를 서울 명동의 한 호프집에서 만났다. '고이즈미 총리 신사참배 위헌 아시아 소송단' 대표인 하토리 료이치씨를 비롯해 교수, 회사원, 미화원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양심적 일본인들이 이번 심포지엄을 평가하는 자리였다. 서승 리츠메이칸 대학 교수 등 한국인들도 일부 참석했다.

국경을 넘어, 미화원에서 교수까지 공감하다

17명 참가자에게서 한 마디씩 듣는데도 3시간이 걸렸다. 각 발언을 다시 한국어로 통역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국민대에서 미술이론을 공부하고 있는 일본 유학생 이바나 마이 씨가 통역을 맡았다.

참가자들은 다른 사람의 발언을 메모하는 등 경청했다. 시민운동을 하기에 결코 좋은 환경이 아닌 일본에서 자국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멀리 한국까지 찾아온 그들의 열정이 잘 묻어나는 모습이었다.

이날 일본의 한 저널리스트가 한 말은 일제 강점 통치의 아픔을 잊어가는 우리 모두 새겨둘 만하다. "한국에 도착하는 순간 가슴이 탁 트인다. 한국의 공기에는 천황제가 없기 때문이다."

맥주 한 잔으로 여행의 마지막날을 기념하는 일본인 참가자들. 교수, 사회운동가, 미화원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구성됐다.
맥주 한 잔으로 여행의 마지막날을 기념하는 일본인 참가자들. 교수, 사회운동가, 미화원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구성됐다. ⓒ 김기
야스쿠니 문제 해결을 위해 협력하고 동지가 될 사람들의 육성을 독자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날 참석자들의 육성을 전한다. 다음은 이날 참가자들의 발언.

하토리(도쿄 거주, 미화원) 심포지엄에서 야스쿠니에 대해 많이 공부했다. 오늘(22일) 아침 서대문형무소를 찾았다. 그곳에서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큰 감동을 받았다. 일본은 큰 잘못을 했다.

요스오카 가즈코(오사카 거주, 어린이평화박물관 운영) 나는 1937년생으로 태어난 곳은 한국이다. 부친은 조선총독부 소속으로 한국인의 땅을 빼앗는 일을 했다. 가해자란 의식이 들어 1980년대부터 침략자 일본의 모습을 증언하는 일에 나섰다. 또 우리 집을 개조해서 침략전쟁 자료관을 열었다.

오오에(나라 거주, 무직) 아직 역사에 대한 생각이 명확하게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오늘 서대문형무소 등을 방문한 뒤 실마리를 찾은 것 같다.

야마시다(도쿄 거주, 회사원) 1970년대 2번, 1990년대에 1번, 2000년대에 들어서는 매년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이희자 선생 등 피해자들의 증언에 감명 받았다.

긴쇼우 세이도쿠(역사학 교수) 전쟁을 겪지 못한 학생들에게 전쟁을 깨닫게 하기 어렵다. 특히 가해자로서 일본의 전쟁책임을 가르치는 것은 더욱 그렇다. 야스쿠니와 일본의 전쟁책임은 근본적으로 연결된 문제이다. 일본의 전쟁책임에서 파생된 여러 문제를 조금씩 해결해가고 싶다.

야스쿠니, 일본의 전쟁책임 문제와 직결

마타요시 세이키요(오키나와대학, 심포지엄 발제) 도쿄에 존재하는 야스쿠니는 천황제의 상징이며 이것은 전전(戰前)으로 회귀 의지를 의미한다. 야스쿠니가 존재하는 것은 동아시아에 대한 침략의지를 의미한다. 야스쿠니 문제는 중요하다. 도쿄가 변하지 않는 한 일본의 변화는 없다. 개인적으로 도쿄에 대해 비관적이었으나 이제는 자신감과 기대감이 생겼다. 열심히 하자.

나카무라 아카라(오사카 거주) 전공투(전학공투회의) 세대다. 한일협정 반대시위로 활동을 시작했고 지금은 반전평화시민운동을 하고 있다. 해외에 나와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심포지엄에서 야스쿠니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았다. 또한 서대문형무소 등을 방문하면서 한국의 반일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토 이즈미(일본문학 교수) 야스쿠니는 죽음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재계 등에서 논하기 어렵다. 야스쿠니에는 군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 어린이, 여자들도 합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문학으로 야스쿠니를 좀 더 쉽게 말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겠다.

"No War shrine!" 전쟁의 신전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일본의 진보적 저널리스트 사카모토 무츠로씨. 가슴에 달린 빨간 리본은 심포지엄 발제자인 알렉시스 더든 교수가 일본 제국주의에 희생된 영령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에서 만든 것이다. 친구의 제안으로 이 리본을 만든 더든 교수 일본 외무성 강연 때 이 리본을 달고 나갔다가 제지당한 적도 있다고 한다.
"No War shrine!" 전쟁의 신전에 반대한다고 말하는 일본의 진보적 저널리스트 사카모토 무츠로씨. 가슴에 달린 빨간 리본은 심포지엄 발제자인 알렉시스 더든 교수가 일본 제국주의에 희생된 영령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에서 만든 것이다. 친구의 제안으로 이 리본을 만든 더든 교수 일본 외무성 강연 때 이 리본을 달고 나갔다가 제지당한 적도 있다고 한다. ⓒ 김기
김은식(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태평양전쟁피해자 지원 활동이 10년째를 맞았다. 한일 양국 국민에게 물어보면 야스쿠니라는 이름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정작 무엇이 문제인지는 대부분 모르는 것 같다. 그동안 야스쿠니 문제가 정치권에서만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전도 없었다. 이제는 일반 시민 차원에서 인식이 확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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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병선(짚풀생활사박물관) 한국에서는 가족이 죽은 후에도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가족의 영혼을 모셔야 한다. 가족의 영혼을 모실 개인의 권리를 일본이란 국가가 박탈하고 있다. 우리 징용자들의 위패를 억압하고 있는 일본에 대해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의무는 분명하다.

나광수(재일동포) 오늘 생전 처음으로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을 보았다. 남에는 독립문이 있고, 북에는 개선문이 있다. 6․15시대를 맞이해 우리 민족은 통일의 문을 세워야 할 것이다. 이번 야스쿠니 심포지엄 같은 일들이 통일의 문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 것이다.

사카모토 무츠로(일본 진보적 저널리스트협회 회원) <헤럴드>에서 야스쿠니를 'war shrine'(전쟁 신전)이라고 표현한 것을 봤다. 정확한 표현이다. 문제는 일본 언론들이 야스쿠니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본 언론들은 민간에서 고조된 헌법수호운동도 제대로 다루지 않고 있다. 얼마 전 야스쿠니 기행이란 글을 썼는데, 그 과정에서 이 운동에 관심을 두고 심포지엄에 참가했다.

마루카와 사토시(메이지대 중국어 교수) 예전에 친구들과 야스쿠니를 부수겠다고 쳐들어간 적도 있다(일동 웃음). 그러나 야스쿠니는 일본 내부에서 사상적으로 부숴야 한다. 이를 위해 내외의 협력이 필요하다. 야스쿠니는 일본이 동아시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표상하기 때문이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외부의 지적이 제기되었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바나 마이(국민대 대학원 미술이론 수학 중) 한국 친구들에게 야스쿠니를 물어봐도 젊은 친구들은 이 문제에 거의 관심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동아시아 공통문제로 야스쿠니를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 한국, 대만, 중국 등이 손을 잡고 협력해서 풀어야 할 문제다.

죽어서도 일본 전쟁 시설에 강제수용된 영혼에게 자유를!

하토리 료이치(고이즈미 총리 신사참배 위헌 아시아소송단) 전공투 세대다. 지금은 일본 평화헌법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지난 8월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아내기도 했다. '고이즈미 5년'은 일본 정치를 파탄시킨 5년이다.

일본엔 이제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교토 부근의 한 현에서는 두 보수정당 후보를 누르고 진보적인 여성후보가 당당히 승리했다. 그와 더불어 '고이즈미 5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징후는 일본 정치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8월 15일 야스쿠니 촛불집회는 일본변화의 첫 봉화가 될 것이다.

이를 한국인이 어떻게 인식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한국인의 많은 관심과 동참을 바란다. 일본이 전쟁책임 등 문제를 해결하고 보통국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당연한 상식에 따라,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렇지 않은 세월이, 일본 사람으로서 무척 부끄럽다.

서승(리츠메이칸 대학 교수) 이번 심포지엄은 야스쿠니와 관련해 세계 최고의 학자와 전문가들이 모였으나 국내 관심이 저조해 유감이다. 야스쿠니는 일본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상징물이다. 유럽의 경우 나치를 고무·찬양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런 경향과 반대로 전쟁에 대한 공공연한 미화가 벌어진다.

야스쿠니는 일본의 전쟁 책임의 상징이자 증거다. 또한 이를 뛰어넘는 인권의 문제다. 야스쿠니 문제를 풀기 위해 피해 당사자의 입장이 중요하다. 태평양전쟁 전범의 합사 문제 이전에 우리 입장에서는 조선 침략의 주범들이 합사된 것도 놓칠 수 없는 대목이다. 거기에 일제 강제징용자 2만1000명의 위패가 강제로 합사된 것도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야스쿠니는 일본 신사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예외적 존재다. 전쟁 전에는 국무성 소속시설이었으며 엄격히 말해서 종교시설이 아닌 군사시설이었다. 죽어서 혼마저도 일본의 전쟁시설에 강제 수용된 억울한 영혼들을 야스쿠니에서 건져내 고국에 안치해야 한다.

합평회 전에 만나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기꺼이 통역을 맡아준 유학생 이바나 마이씨와 일본인 참가자들의 합평 모습. 일본인 참가자들의 야스쿠니 인식은 서로 달랐으나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해서는 대부분 의견이 일치했다.
합평회 전에 만나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기꺼이 통역을 맡아준 유학생 이바나 마이씨와 일본인 참가자들의 합평 모습. 일본인 참가자들의 야스쿠니 인식은 서로 달랐으나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해서는 대부분 의견이 일치했다. ⓒ 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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