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능력은 특별하지 않은 일상의 이야기가 특별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사람들에겐 아무 느낌 없이 지나가는 일상의 순간을 잡아 숨소리를 불어넣는 것.
그런데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를 읽으며 또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별한 얘기를 평범한 일상처럼 잡아내는 것 또한 소설가들만의 재능이라는 것. 결국 소설가란 특별한 얘기를 평범한 듯, 평범한 얘기를 특별한 듯 그려낼 수 있는 전방위 이야기꾼인 셈이다.
장기 이식을 받아 소생한 뒤 분쟁지역 전문취재 피디가 되어버린 남자의 이야기,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다가 자살해버린 남자의 이야기 등 인터넷에서 접했던 이 소설집의 줄거리는 너무 특별했다.
신문지상에서 들어는 봤지만 주위에서 그다지 흔하게 발견할 수 없는, 어쩐지 극단적으로 느껴지는 소재의 이야기들. 소재의 특이함이 오히려 진부한 느낌을 주어서 처음에는 이 소설집을 읽어야 할까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이 책을 읽기로 결정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미경이라는 작가의 이야기 솜씨를 이미 맛본 경험이 있었던 탓이다.
특별한 이야기를 평범하게 풀어내는 작가의 솜씨
'과연 이 책을 계속 읽게 될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역시…'라는 감탄사로 바뀌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정확한 지명은커녕 국적조차 알 수 없는 그 병원에서의 일은 돌에 새긴 이름처럼 끝내 내 생의 마지막까지 남을 것이다.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축복이란 걸 늦게야 알았다. 그곳에서의 하루하루는 뇌의 주름에 문신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오히려 기억은 더 선명하게 깊어졌다. 복도에 가득했던 소독약 냄새, 수술실에서 마취약의 기운이 온몸에 퍼지기 전 마지막으로 귀에 들렸던 쇠붙이들의 찰캉거리는 소리, 식사시간이면 입맛을 잃게 하던 불쾌한 향신료 냄새까지도. 기억은 뇌에서만 유지되는 게 아닌지도 몰랐다. 몸속에서 팔딱거리는 신장이 눈과 코가 달린 것처럼 그것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형수의 장기를 이식받고 분쟁지역에만 일부러 달려가게 된다는 이 사나이의 이야기가 조금도 낯설지 않다. 바로 옆집 아저씨가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들려주는 듯, 인위적인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친근한 묘사.
이후 작품들에서 소재는 다채롭게 바뀐다. 기러기 아빠의 생활, 대학 강사를 연인으로 두고 조금씩 망가져가는 여인의 일상, 방안에 틀어박힌 채 나오지 않는 아들을 둔 가족의 이야기 등 전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옮아가면서도 조금의 이물감도 없이 그들의 이야기에 빨려들어 가게 되는 경험을 통해 독자는 소설가의 존재 의미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이른바 '지식인'이라 불리는 남자를 연인으로 둔 백화점 여점원의 이야기인 <모래폭풍>은 지식인의 위선과 허상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김이소의 <거울보는 여자>, 이서인의 <특별한 선물>의 계보를 잇고 있다.
자신보다 지적으로 우월한 남자를 연인으로 둔 미모의 여인이 그에게서 이용당하고 임신한 후 결국 아이를 지운다는 이야기다. 소재 면에서 다분히 상투적인 이 단편은 탁월한 이야기꾼인 정미경의 손을 거치며 '특별하고 호소력 있는 이야기'로 태어난다.
때로는 잘 쓴 소설집 한권을 보는 것이 시사프로그램을 매일 보는 것보다 세상 보는 눈을 더 넓게 열어주는 경우가 있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나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같은 작품들은 사회 문제를 깊게 파헤쳐 독자들 앞에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자살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인간들이 애초에는 얼마나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사회의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문제들의 근원지를 엄숙하게 묻고 있다.
소설로 들여다보는 세상사가 얼마나 깊은 맛을 내는지를 체험하고 싶은 이에게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를 주저 없이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