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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산책길에 만난 작은 풍경
아내와 산책길에 만난 작은 풍경 ⓒ 안준철
오랜만에 시가 찾아온 그날, 아내와 저는 저녁을 일찍 먹고 방천길로 나가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원해서 나온 산책길이었지만 저는 몸이 많이 피곤해 있었습니다. 지리산 산행을 앞두고 몸을 만들 생각으로 사뭇 빠른 걸음으로 가까운 산을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며칠 째 계속된 준비산행으로 인해 아내와 저녁 산책을 못하게 된 것이 미안해서 그날은 좀 무리를 했던 것이지요. 아내는 며칠 산책을 못하다가 저녁에 운동을 하러 나온 것이 좋았던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 나 지금 너무 행복한데 딱 한 가지 소원이 있어."
"뭔데?"
"다른 것은 다 그대로 있고 당신과 나, 십 년만 젊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내의 소원대로 십 년이 젊어진다면 아내는 마흔 둘, 저는 마흔 셋이 됩니다. 저는 아내의 소원을 욕심으로만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실 그동안 아내는 철없는 남편의 우산이 되어주느라 행복할 겨를이 없었던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제는 제가 아내의 우산이 되어줄 차례인데 아내나 저나 어느 새 노후를 생각할 나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언젠가 '내 나이가 마흔이라니…'로 시작되는 시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시인은 아내가 돌아가고 싶은 기적 속의 나이를 살고 있지만 자신의 황금 같은 시절을 감사하며 행복해하기는커녕 한탄만하고 있는 것이지요. 가만 생각해보니 저도 지금은 꿈에라도 돌아가고 싶은 사십대를 그런 불평과 푸념 속에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비에 젖지 않기 위해 제게 바짝 다가선 아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보, 당신 사십대 때는 당신이 젊다고 생각했어? 아니지? 그땐 삼십대가 그리웠겠지?"
"맞아. 그때는 마흔 살이 된 것이 징그러웠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린 지금 실제 나이가 육십대야. 그런데 하나님이 특별히 당신의 소원을 들어주어서 오십대가 된 거라고 생각해. 당신이 그랬잖아. 다른 것은 다 그대로 있고 당신하고 나하고 십 년만 더 젊어졌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우리가 오십대가 된 거라니까. 이 기적의 나이를 정말 감사하면서 행복하게 살아보자고."

동천 길가에 핀 달개비(닭의장풀이라고도 함)
동천 길가에 핀 달개비(닭의장풀이라고도 함) ⓒ 안준철
사람의 생각과 말이란 참 신기합니다. 아내는 마치 제가 무슨 마술이라도 부린 듯 금세 달라진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우산 속에서 말입니다. 우산 속에서…. 만약 그때 우산이 없었다면, 우산이 장대비로부터 아내와 저를 막아주지 않았다면 그런 행복한 순간들이 있기나 했을까요?

제가 사는 남쪽 지방은 비가 그쳤지만, 또 며칠째 폭우가 쏟아지면서 전국에 비 피해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행복했던 보금자리를 잃고 기본적인 의식주마저 해결하지 못하고 계시는 그분들을 생각하면 이런 글을 쓰는 것조차 죄스럽습니다. 그분들에게 우산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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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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