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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문출판사를 기억하시는지?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소년기를 보낸 내게 잊을 수 없는 출판사를 꼽으라면 누가 뭐래도 해문출판사다. 종이나 깡통 등으로 이것저것 만드는 공작 시리즈와, 페이지를 넘기면서 스토리가 변하고 다른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 게임북 시리즈 등 주로 소년들을 위한 책을 많이 펴냈다.

해문출판사의 주특기는 바로 추리소설이었다. 손에 잡기도 좋은 문고판으로 쏟아져 나오던 해문출판사의 추리소설과 함께 내 소년기는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중 여러 탐정들을 한 권에 모아 놓은 명탐정 대백과 같은 책들이 몇 권 있었다. 이 책들은 두말할 것도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셜록 홈즈부터 형사 콜롬보는 물론 하드보일드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름도 잘 모를 미국 탐정들까지…. 무수한 탐정들 중 제일 좋아하는 탐정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포와르였다.

셜록 홈즈는 멋지기라도 하지, 대머리에다 배가 나와 의자에 앉아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현장을 뒤지기보다는 앉아서 머리를 굴려 사건을 해결하는 포와르 탐정을 좋아한다고 하면 친구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쩌면 전형적인 탐정 모습에서 벗어난 포와르의 그런 특징들이 어린 내 마음을 끌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선 무척 낯선 벨기에라는 나라 출신이라는 점까지도 뭔가 매력으로 느껴졌다. 친구들이 장난으로 머리라도 때릴라치면 "감히 나의 회색 뇌세포를!"이라고 할 정도로 난 포와르에 푹 빠져 지냈다.

▲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비롯한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은 여러 출판사에서 나와 있다. 셜록 홈즈와 괴도 뤼팽도 어른들을 위한 완역판이 전집으로 나와 있다.
ⓒ 해문출판사外
얼마 전 아내와 함께 서점에 들렀다가 문득 발걸음을 추리소설 코너로 옮겼다. 세상에나, 아직도 해문출판사가 추리소설을 펴내고 있었다. 요즘은 사람들이 추리소설을 좀 읽는지 직원에게 물어보니 한동안은 다른 대중소설들에 밀려 약세였다가 최근 몇 년 사이 추리소설 완역본 전집들이 나오면서 다시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한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골라 들고 계산대에 서니 한때 추리소설 보는 소녀였던 아내가 "포와르 탐정이네?"하더니 "당신 닮아서 고른 거야?"라고 묻는다. 뇌세포 수준이 포와르에 이르렀다는 칭찬으로 듣고 싶지만 어느덧 추리소년은 대머리에 배나온 아저씨가 되어버렸다.

통합형 논술도 친절한 포와르씨와 함께

추리소설의 좋은 점 하나는 술술 넘어간다는 것. 물론 탐정과 함께 단서를 꼼꼼하게 짚어 나가자면 시간이 걸리지만, 급박한 사건과 호흡을 같이하고 빨리 비밀을 파헤치고 싶은 마음에 속도를 내다보면 어느새 한 권이 뚝딱이다.

추리소설이 좋은 또 다른 이유는 다중 독서가 가능하다는 것. 결말을 알고 나서 다시 처음부터 읽어나갈 때 범인, 목격자, 혹은 피해자로 관점을 설정해서 빠져들면 새로운 맛을 즐길 수 있다. 또는 소설엔 배역이 없는 제3의 구경꾼을 하나 설정해서 자신이 그곳에 있는 기분을 즐겨 볼 수도 있다.

요즘 새롭게 깨달은 추리소설의 효용 중 하나는 교육 시장에서 한창 유행인 '통합형 논술'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단서를 모아 논리를 세워 나가는 탐정의 모습이야말로 논술의 모범이다. 어른들의 치매 예방 차원에서도 추리소설을 의학적으로 활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주특기 분야이자 많은 추리소설들이 의지하고 추구하는 '밀실살인'과 '깜짝 놀랄 반전'을 담고 있다. 추리소설이니 스포일러를 조심해야 할 테고, 지금도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명탐정 코난'이 입에 달고 다니는 "이것은 밀실살인이야!"나 "범인은 이 안에 있어!" 같은 말들의 뿌리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다시 읽으며 영화 <친절한 금자씨>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영국 <옵저버>지에서 <친절한 금자씨>를 '한국판 오리엔트 특급살인'이라고 소개한 적도 있다.

그러나 '누가 누굴 베꼈다' 같은 문제가 아니라, 딱딱한 책 <시뮬라시옹>과 흔히 어린이용 책으로 간주되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만나 영화 <매트릭스>가 나왔듯이 '새로운 미디어를 창조하는 데도 역시 독서가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얘기다.

우리 포와르 탐정님은 사건을 해결하고 관련자들 앞에 두 가지 결말을 제시하며 하나를 고르게 하는 친절한 모습을 보여주신다. 회색 뇌세포만 대단하신 것이 아니라 친절한 마음씨도 일품이시다.

보다 자세한 내막은 직접 오리엔트 특급에 탑승해 확인해 보시길!

덧붙이는 글 | 최근에 나온 완역판에서는 '푸아로'로 번역되었습니다만 어린 시절 추억을 살리는 뜻에서 '포와르'로 적었습니다. '회색 뇌세포'도 번역에 따라서는 '잿빛 뇌세포'로 적는 곳도 있는데 역시 어린 시절 추억과 일반적인 습관을 따라 '회색'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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