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앤의 집에 들어서자 집안 곳곳에는 RMH 암 전문의사로 일하는 딸과 그녀의 가족사진이 많이 걸려 있었다. 앤의 남편은 딸의 얼굴과 이름이 나온 신문과 잡지를 보여주면서 딸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들 노부부의 딸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침내 사위가 화제가 올랐다.
- 사위가 전업 주부로 집에 있으면서 살림만 하는 게 좀 어색하지 않은가?
"천만에. 원래 사위도 일을 했었다. 그런데 아이가 둘이나 되자 그 아이들을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위가 직장을 그만 두었다."
- 딸이 돈을 더 많이 벌었던 모양이다.(웃음)"
"그렇다. 어차피 아이를 돌볼 사람이 필요한 시점이었는데 자기 부모 이상으로 아이를 잘 돌봐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사위는 아주 자상해서 두 아이들과 잘 놀아주고 집안 살림도 잘 한다. 딸도 이 점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남편의 느닷없는 발언이 튀어나왔다.
"앤, 실은 나도 전업 주부가 되고 싶다."
'에엥? 뭐야, 대학교수 그만 두고 전업주부가 되고 싶다고?'
남편의 갑작스러운 '폭탄선언'이 사실 놀랍긴 했다. 하지만 그동안의 남편 행적(?)을 돌아보면 하나도 놀랍지 않은 발언이었다.
이 자리에서 남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좀 쑥스럽긴 하지만 팔불출이 될 각오를 하고 남편 이야기를 해 보자면….
사실 남편은 살림을 잘 한다. 아니, 뭐 '살림'이라고까지 거창하게 말할 것은 없고 살림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요리를 잘 한다. 그렇다고 요리를 '잘'한다고까지 하기는 또 뭣하다. 그냥 요리 하는 것을 좋아한다. 즐겨 한다.
그동안 남편이 집에서 선보였던 요리를 열거하자면….
된장찌개, 김치찌개와 각종 국 종류는 남편이 맘만 먹으면 즉각 식탁에 올릴 수 있는 '기본' 요리다.(둘째 아이를 낳았을 때 남편이 산후조리를 다 해주었다. 마침 방학중이어서 미역국도 끓이고 기저귀도 직접 빨았다)
이런 기본 외에 남편이 자주 했던 요리는 삼겹살김치볶음밥과 콩나물밥, 닭백숙, 닭죽 등이 있다. 그리고 특별한 날에 선보이는 불고기, 갈비 등이 있고 오향장육도 있다.
사실 오향장육은 오래 전에 했던 요리인데 중국집에서 먹는 것과 같은 완벽한 오향장육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향신료를 포함한 재료를 제대로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무늬는 오향장육이 분명했다. 맛은 어땠냐고? 괜찮았다. 적어도 우리 가족이 평가하기에는.
이밖에 갈비탕, 우족탕, 도가니탕 등도 남편이 최근에 시도해본 요리다. 남편이 요리사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전문적인 요리를 하느냐고? 아내인 나로부터 배운 솜씨냐고? 오, 천만의 말씀!
나는 요리를 즐겨하지 않는 주부다. 더욱 솔직히 말하자면 요리를 못하는 주부다. 어떤 이들은 이런 주부를 '불량주부'라고 하기도 하던데 주부의 역할이 요리가 다는 아니지 않는가.
그런 까닭에 별로 기죽지 않고 잘 살고 있다. 물론 요리를 잘하면 좋겠지만 세상의 모든 남편들이 집에서 못질을 잘 하고 고장난 가전제품을 잘 고치는 건 아닌 거나 마찬가지다. 설사 그런 걸 못 해도 남편 구실을 하는데 크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니까.
내가 요리를 즐겨하지 않는 것에 대해 굳이 핑계를 대자면….
나는 기본적으로 먹는 것에 대해 큰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요리를 직접 하는 것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요리를 잘 못하게 된 것이고…. 결국 악순환이다.(사실 공부를 못하는 사람도 알고 보면 능력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공부에 대한 관심이나 흥미가 없기 때문 아니던가)
하여간 나는 매끼 식사를 캡슐 하나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세상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미래인'이다. 그런가 하면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이곳저곳을 배회하거나 스스로 '식도락가' 혹은 '미식가'라고 칭하며 먹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원시인'이기도 하다.
물론 '먹는 게 남는 거'라거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며 먹는 걸 무슨 의식 치르듯 진지하게 치르는 사람에 대해서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들은 나와 생각이 다를 뿐이니까. 틀린 게 아니고.
어쨌거나 요리에 관한 한 나는 별로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가족들에게 최선은 아닐지라도 차선은 다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식구들에게 인스턴트 음식을 자주 사 먹이거나, 돈 주고 산 김치나 다른 반찬을 식탁 위에 올려놓은 적이 한번도 없었으니까. 하여간 부실한 아내와 사는 남편이 요리를 잘 한다는 건 축복받은 일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사실은 내가 직장 때문에 5개월 정도를 가족들과 떨어져 지낸 적이 있었다. 그 때 남편은 나를 대신하여 아이들 뒷바라지를 다 했다. 말하자면 전업주부 역할을 한 셈이었다.
그때 남편이 이런 말을 했다.
"아니, 어떻게 된 게 아이들도 엄마가 없다는데 걱정을 안 하고, 아내라는 사람도 남편 걱정을 하나도 안 하나. 좀 이상한 거 아니야?"
그만큼 남편은 우리 모두에게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런 오랜 배경이 있기에 남편이 앤 부부 앞에서 전업주부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까. 아니,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기까지 했다.
"맞아요. 이 사람은 전업주부 경력도 있고 살림 하는 것도 싫어하지 않아요. 아마 내 남편도 전업주부가 되면 당신 사위처럼 아주 잘 할 거예요. 문제는 내가 당신 딸 메리처럼 고소득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죠."
솔직히 밖에 나가서 내가 돈을 벌고 남편이 살림을 하더라도 지금 생각으로는 크게 나쁠 것 같지 않다. 그런데 과연 그게 현실이라면 머릿속 생각처럼 이런 사실을 나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남편의 최근 야심작(?) '도가니탕' 사진은 어디로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