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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도에서 지낸 어린 시절, 여름날은 해가 길기도 했다. 그 때는 시간이 너무 안 갔다. 하루가 '지업고도 지업었다'(지루하고 지겨웠다).
학교 공부를 끝내고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친구들이랑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올라온다. 집까지 오는 길이 멀지도 않았는데 그 때는 왜 그리도 '지업고'(지루하고) 멀기만 한 지 온갖 '저지레'(장난)를 다 하면서 올라온다.
올라오면 동네 전답이 보인다. 들에서 일하시는 엄마들은 집집마다 자기 집 아이들이 언제 올까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모양인지 이쪽 밭에서도 "숙아~ 소 믹이로 가거레이~", 저쪽 밭에서는 "자야~ 소죽 낄이놓고 밥 해레이~" 하면서 우리를 불렀다. '하이고 무시라'(무서워라). 집집마다 시키는 일이 '우에'(어떻게) 그리도 '많겠노'. 그 때는 어찌 그리 일을 하기 싫던지….
우리 동네 밑에는 '아래깍단'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아래깍단' 들머리에는 두레박으로 물을 긷는 우물(경상도식 표현으로는 '새미')이 있었다. 여름 햇살을 받으며 터덜터덜 걸어오던 우리들은 '아래깍단 새미'에서 발을 멈췄고 두레박을 내려서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우물 옆에는 홰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는데 우리는 그 그늘 아래 퍼질러 앉아서 '빰돌'(공깃돌놀이)을 했다.
'빰돌'은 깨진 기와조각을 동그스름하게 잘 다듬어서 만들었다. 자잘한 돌멩이를 주워서 하기도 했다. 우리는 손 안에 딱 들어오는 '빰돌' 다섯 개를 항상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 매일 하다 보니 손에 익어서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었다. 돌멩이보다는 기왓장으로 만든 '빰돌'로 하면 더 잘 놀 수 있어서 우리는 깨진 기왓장 찾느라고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기도 했다.
땅바닥에 앉아서 '빰돌'을 하다보면 시간가는 줄 몰랐다. '빰돌'을 하기 싫어지면 '땡삐'(땅벌)를 잡아 허리를 똑 잘라서는 뱅뱅 돌렸다. 대가리는 버리고 꼬랑지만 땅바닥에 놔두면 '땡삐'가 뱅뱅 돌았다.
목이 마르면 물 한 바가지 퍼서 마시고 입이 심심하면 밀밭에 가서 밀을 훑어서는 손바닥으로 싹싹 비벼서 한 입에 탁 털어 넣었다. 밀을 입에 넣고 오래 씹다보면 껌을 씹을 때와 비슷하게 끈기가 생기는데, 우리는 껌 대신 밀을 많이 훑어 먹었다. 이렇게 놀다가 집에 오면 텅 빈 집 마당엔 햇살만 가득했다.
해가 설핏 기울기 시작하면 땡감을 몇 개 따서 팬티 고무줄에 끼우고 왕소금 한 움큼 집어서 종이쪽지에 싸서는 뒷산으로 내달렸다. 한 입 베어 물면 떨떠름하고 입 안이 뻑뻑해지는 땡감을 왕소금에 꾹 찍어서 씹어 먹으면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하지만 몇 입 먹지 않아도, 가슴이 턱턱 막혀왔다. 그러면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치면서 "와와 뭇노(먹었나), 묵고 싶어 뭇따, 맻 쪼가리 뭇노, 두 쪼가리 뭇따"라고 노래 부르며 산에 올라갔다.
뒷산 '만댕이'(꼭대기)에는 동네 애들이 모여서 놀고 있었다. 아침에 산에 올려놓으면 소들은 하루 온종일 풀을 뜯으면서 산을 한 바퀴 돌아서 뒷산 꼭대기에 와 있었다.
소 찾으러 온 우리는 온 산이 비좁도록 뛰어놀았다. '머시마'(남자애)들은 말 타기도 하고 전쟁놀이도 하지만 '여식아'(여자애)들은 한데 모여서 '빰돌'을 했다. 편을 갈라 '빰돌'을 하다보면 손등에는 뽀얗게 흙먼지가 앉았고 손톱은 닳아서 깎을 필요도 없었다.
저녁 어스름이 밀려오고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를 때면 우리들은 툴툴 손을 털고 소를 찾아 몰고 내려왔다. 하루 종일 배불리 풀을 뜯은 소들은 주인이 일부러 찾지 않아도 제 혼자서 집을 찾아 산을 내려갔다. 소들이 앞서고 애들은 그 뒤를 따라서 산을 내려오노라면 푸르스름한 저녁연기가 온 동네를 감싸고 있었다.
'마실'(마을) 어귀에 도착하면 돌담장 너머로 밥 익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종일 온 산을 헤매고 다녔던 우리는 그 냄새에 허기가 돌았고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그래서 소 궁둥이를 괜히 한번 철썩 치며 말했다. "이랴, 빨리 가자".
어떤 재수 없는 날엔 우리 소가 싸움질을 해 소 '뿔떼기' 하나가 빠져버렸다. 아버지께 꾸중들을 생각에 겁이 난 나는 소를 살짝 외양간에 묶어두고는 잽싸게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문고리를 잠그고 숨을 죽인 채 바깥 기척에 귀를 세우고 있었다. "밥 '무로'(먹으러) 나오너라"는 말이 들릴 때까지 덥고 답답한 방 안에서 죽은 듯이 숨어 있었다.
우리 동네 한 가운데에는 논 한 마지기가 될까 말까한 빈 터가 있었다. 원래는 논이었는데 동네에서 사들여 마을의 공터로 이용했다.
저녁밥을 먹고 나면 동네 사람들은 이 빈 터로 나왔다. 집 안은 덥고 답답하지만 그곳은 넓고 시원한데다 밤새도록 60촉짜리 백열등을 켜두어, 환하고 좋았다. 그래서 다들 빈 터로 나왔다.
동네 '할배'들은 담뱃대에 담배를 볼록하게 채워서 양 볼이 쏙 들어가도록 장죽을 빨아 댕겼다. 이야기 한 자락에 '풍년초' 한 모금 빨고 대꾸 한 마디하면서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할매'들은 좀 떨어진 곳에 깔아놓은 멍석 위에 앉아서 부채를 슬슬 부치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할매' 무르팍을 베고 누운 손자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잠에 빠져들곤 했다.
낮에 그렇게 놀고도 뭐가 또 모자랐는지 우리들은 밤새도록 '빰돌'을 했다. '범굴'에다 '알까기', '줄줄이'에다 '솥걸기'까지 편을 갈라 재미나게 놀았다. 감나무에 달아놓은 백열등 근처에는 하루살이들이 떼 지어 달려들었다. 빈 터 한 쪽에는 소나무 가지로 만든 철봉대가 있었는데 머리 굵은 '머시마'들은 철봉을 휙휙 넘으면서 팔 힘을 키웠다.
머리 위로 은하수가 밤하늘을 가르며 흘러갔고 가끔씩 별똥별이 떨어지기도 했다. 어른들이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 소리며 부채질 소리에 밤이 깊어갔고 우리는 아쉬운 맘을 뒤로 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밤은 점점 깊어갔다. 이슬이 촉촉하게 내리는 그런 밤이었다.
덧붙이는 글 | 제 고향 경북 청도에선 '공깃돌놀이'를 '빰돌'이라 그랬어요. '빰돌'은 다섯 개의 공깃돌로 하는 놀이입니다. '빰돌'을 하나씩 잡아올리는 한 알, 두 개씩 올리는 두 알,그리고 세 알, 네 알까지 차례대로 합니다.
그 다음엔 '범굴'을 하지요. '범굴'은 공깃돌 다섯 개를 땅에 굴려놓고 적당한 곳에다 첫째 손가락과 셋째 손가락으로 굴을 만들어서 그 안으로 공깃돌을 몰아넣는 놀이입니다.
'알까기'는 먼저 받은 공깃돌을 뒤로 보내 땅에 놓으며 나중 받은 공깃돌을 손에 남기는 방법으로 계속합니다.
'줄줄이'는 공깃돌을 받은 차례대로 계속 손 안에 둔 채 다음 공깃돌을 집습니다. 맨 마지막엔 공깃돌 다섯 개가 다 손 안에 있겠지요.
'솥걸기'는 공깃돌 세 개로 솥 다리를 만들고 마지막 한 개를 그 위에 얹는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