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이 어제(3일) 보도했다. 지방선거 유세를 하던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를 습격한 지충호씨의 신용카드 사용내역 등을 조회해달라고 '모 일간신문 기자'가 외환은행 직원에게 요청했고 이에 따라 외환은행 직원들이 관련 정보를 건넸다는 내용이었다.
<경향신문>은 "외환은행 직원들의 이런 행위가 금융실명제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논란의 여지는 없다. 명백한 불법행위다. <경향신문>이 오늘 후속 보도한 바에 따르면 '신용정보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일 가능성이 크다고도 한다.
관심사는 모 일간신문 기자가 누구인지, 또 그 기자의 행위는 정당한 것인지 하는 점이었다.
<조선일보>가 오늘, 답을 내놨다. 모 일간신문 기자는 바로 자사 기자이고, 신용카드 내역 조회 요청은 언론자유에 해당한다는 취지로 보도했다. 대한변호사협회 하창우 공보이사의 말을 인용해 이런 말도 덧붙였다.
"야당 대표에게 테러를 가한 사람에 대해 언론이 보도한 것을 두고 경찰이 무리한 수사를 하는 것은 언론 자유에 대한 침해(다)."
과연 그럴까? 우선 가를 게 있다. 하창우 공보이사와 <조선일보>는 '보도'를 거론했지만 논점은 그게 아니다. '취재'다. 취재윤리의 문제다. 법률 상식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는 불법행위를 기자가 요구한 것이 취재윤리에 부합되는가 하는 점이 핵심 논제다.
핵심은 '보도'가 아니라 '취재윤리'
에둘러 갈 필요가 없다. 몇 가지 사례가 있다.
지난해의 일이다. MBC
이 황우석 교수 논문조작사건을 취재하면서 김선종 연구원에게 이른바 '강압 취재'를 한 사실이 밝혀졌을 때 <조선일보>는 어떤 태도를 취했던가? 11월 29일자 사설에서 이렇게 질타했었다.
"취재방식이 '다른 사람이 자백했으니 사실대로 말하라', '황 교수는 곧 검찰에서 처벌받게 된다'는 식이었다면 언론 기본윤리에서 실격이다."
<조선일보>가 자체 제정한 '기자준칙'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다. "우리는 국민의 기본권 신장과 보호에 최선을 다 한다" 그럼 지충호씨의 경우는 어떨까? 형사 피의자라고 해서 기본권(프라이버시권)을 침해해도 되는 걸까?
직접 연관되는 사례도 있다. 몇년 전 모 일간지 기자가 법원에서 유죄(벌금형)를 선고 받은 일이 있다. 보험설계사로 일하던 특수 관계인을 통해 모 정치인 부인의 보험계약 내역을 빼내 보도했다는 이유였다. 이번 경우와 매우 흡사한 사례다.
취재윤리 문제는 이 정도로 갈음하자. <조선일보>가 제기한 다른 문제가 있다. 경찰의 이번 수사가 정치적으로 기획된 수사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혹이다. 정황도 제시했다. 이런 것들이다.
▲ 서울경찰청 김영기 수사2계장이 지난 3일 '누가 지시한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위에서)하라고 그러니까 했죠"라고 답변했다가 나중에 수사과장이 답변을 수정했다.
▲ 이번 수사를 담당하는 서울경찰청 수사2계 지능팀은 특수수사과와 함께 청와대 '하명 수사'를 주로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진 곳이다.
▲ 외환은행 관계자가 "경찰 수사는 처음부터 우리 직원보다 조선일보 기자의 불법행위 여부를 캐내는 데 초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수사2계장이 언급한 '윗선’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외환은행 관계자의 '느낌'을 덧대 의혹을 제기하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일까 싶지만 이것도 접자.
자기 모순에 빠진 <조선> 보도
정말 의아한 건 따로 있다. <조선일보>는 사례 하나를 추가했다. 수사2계장이 '위'에서 시키니까 조사한다고 말하자 기자들이 '계륵 대통령 때문에 한 거예요?'라고 물었는데 수사2계장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조선일보>가 '계륵 대통령'이란 칼럼을 게재한 데 대해 청와대가 취재협조 거부를 선언하며 강경대응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계륵 대통령'이란 칼럼으로 전면전의 기운이 조성되던 차에 경찰 조사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럴까? 아니다. 아니라고 단정하는 근거는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조선일보> 기사 안에 녹아있다.
<조선일보>는 경찰 수사가 "특급 보안을 유지한 상태에서 매우 은밀하게 진행됐(다)"며 "이미 한 달 전부터 수사에 착수했다"고 전했다. 좀 더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이번 사건을 최초 보도한 <경향신문>의 보도를 참조하면 경찰의 수사 착수시점은 지난달 18일이고, 외환은행을 압수수색한 시점은 수사 개시 엿새 후인 지난달 24일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경찰 수사와 '계륵 대통령'은 아무 상관이 없다. '계륵 대통령'이 <조선일보>에 게재된 시점은 경찰이 수사에 착수한 지 열흘 뒤인 지난달 28일이다. 선후관계가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조선일보>가 제기한 의혹은 아전인수격 과잉논리에 불과할 뿐이라고 마무리하려 했는데 이번엔 <경향신문>이 뒷덜미를 잡는다. 각도는 약간 다르지만 <경향신문>도 경찰의 수사 착수 배경에 의문을 제기했다.
경찰 수사, 정치적 논란으로 번지나
<경향신문>은 지충호씨가 박근혜 당시 대표를 습격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수사에 착수한 이유가 "석연찮다"고 했다.
지난달 18일 경찰이 구치소에 수감된 지씨를 찾아간 자리에서 지씨가 자신의 개인정보 유출 문제를 제기해 수사에 착수하게 됐다는 게 경찰 설명인데 "거꾸로 (경찰이)수사를 유도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고 했다.
이건 또 무슨 얘기인가? 답을 찾기 위해 <경향신문>을 재삼재사 훑었지만 단서는 없다. 오히려 "당시엔 지충호씨 사건의 본류 수사에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란 경찰의 설명만 제시돼 있다. 현재로선 후속보도를 지켜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도 하나 짚을 건 있다. 실정법과 취재윤리 위반 여부에 대한 '판정'으로 끝날 일이 정치적 '논란' 거리로 부상할 조짐이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경우에 따라선 사건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