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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애인이 결혼을 하는 날, 사람들은 뭘 할까? 눈물이라도 흘려야 할 것 같지만 <달콤한 나의 도시>의 서른한 살 노처녀 오은수 대리는 다르다. 평상시처럼 일을 한다. 그러나 그날 오후 베스트 프렌드 중 한 명이 결혼하겠다는 소리를 한다면? 그렇다면 위로가 필요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던 오 대리는 핸드폰에 저장된 목록들을 살펴보다가 일 때문에 알게 된 남자에게 전화를 한다. 위로를 받아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아뿔싸! 한껏 꾸미고 나가니 그 남자는 다른 여자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오 대리를 이용한다. 이쯤 되면 오 대리가 참지 못하고 뭔가 저질러도 크게 저지를 것 같다.

오 대리의 대책 없는 나의 하루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오 대리는 저지른다. 처음 만난 남자, 핏덩이 같은 청년 태오와 '원나잇 스탠드'를 저질러 버린 것이다. 그게 바로 옛 애인이 결혼한 날 노처녀 오 대리가 보낸 엉망진창에 기구만장이 더해진 하루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이런 날이 왠지 반복될 것만 같다. <달콤한 나의 도시>라는 제목과는 기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대책 없는 나의 하루' 식으로.

▲ 책 겉표지
ⓒ 문학과지성사
정이현의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문학과지성사)는 노처녀에 관한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성장소설이 어른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 특히 어른 중에서도 노처녀를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 약간은 미심쩍게 여겨질 수 있겠지만 그리 심각하게 볼 필요는 없다. 먼저 어른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은 나이 먹었다고 무조건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럭저럭 이해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노처녀라는 사실은? 정이현이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 노처녀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는 뭘까? 노처녀라는 단어가 지닌 파생음을 떠올려보자. 이 단어는 그 자신의 음보다 단어를 둘러싼 문장들의 음이 강하게 드러난다. 한마디로 노처녀하면 이러쿵저러쿵 하는 주변의 말들이 상당히 심각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당사자가 이에 초연하지 못하다는 점. 가령 이런 것이다. "너만 결혼 안하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소신'을 밝히면 그만일 텐데 자신만 낙오자의 길에 들어섰다는 자괴감부터 만들어낸다.

이런 건 어떨까? 누군가 "지금 노처녀 히스테리 부려?"라고 농을 건네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면 되는데 정말 노처녀 히스테리인가 생각하게 된다. 혹은 사람들의 시선에 맞춰 자신의 '레벨'을 따지는 것도 있다. '이 나이에 이 정도 남자면 다시 보기 힘들다'는 생각에 좋은 감정이 없어도 연락하는 그런 것이다. 가슴 속에 단단한 무언가가 있어야 할 텐데 작은 바람 소리에도 이리 흔들렸다 저리 흔들렸다 한다. 자신의 마음보다 남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말이다.

성장소설, 중요한 건 나의 마음이라고 깨닫다

<달콤한 나의 도시>의 오 대리도 그렇다. 결혼을 하기는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베스트 프렌드가 결혼한지라 더욱 마음이 조급한데 쉽게 결정이 나지 않는다.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 오 대리를 고민케 하는 남자는 세 명이다. 첫 번째는 원나잇 스탠드로 인연 맺은 태오. 웃음이 맑고 착하다는 게 좋은데 문제는 영화감독을 꿈꾸며 산다는 것. 한마디로 꿈 먹고 사는 남자다. 게다가 어리다. 같이 다니면 막내고모 소리 들어야 할 판이다.

두 번째는 회사 상사의 소개로 알게 된 김영수. 평범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평범하다. 어디 내놔도 튀지 않는다. 오 대리 입장에서는 결혼하기에 무난하다는 게 마음에 든다. 하지만 그게 또 마음에 안 드는 이유가 된다. 너무 심심하다고 할까? 평생 살 것을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세 번째는 단짝친구의 친척이자 편한 친구인 유준이다. 장점이라는 것은 서로 비슷하다는 것, 그야말로 환상궁합이 될 것만 같다. 단점은 그게 결혼생활에서도 유지될지 모를 뿐더러 결혼한 뒤를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달콤한 나의 도시>에서 오 대리는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참으로 오랫동안 고민한다. 평생 고민만 하다가 늙어 죽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

그런데 무슨 일인가. 고민하던 오 대리의 얼굴에 평화로움이 들어앉는다. 내일 죽을 사람처럼 오늘 꼭 선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친구의 결혼 실패 때문일까? 꼭 그것만은 아니다. 결혼은 물론이고 그 외의 것들,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이러쿵저러쿵하는 말들이 자신을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걸 알아가기 때문이다.

오랜 소동 끝에 오 대리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이라는 걸 깨닫고 <달콤한 나의 도시>는 성장소설답게 끝을 맺는다. 한 뼘 정도 커진 마음의 크기를 보여주면서.

단편소설에서 맹활약했던 작가라 할지라도 장편소설에서 그 실력을 그대로 뽐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만큼 정이현의 행보를 바라보는데 일말의 걱정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은수를 쫓는 정이현의 글 솜씨는 단편소설에서 보여줬던 집중력은 물론이거니와 기대하지 못했던 즐거움까지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장편소설에 늦게 발을 들여놓았는가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니 오죽할까?

콜라처럼 톡톡 쏘고, 마시멜로처럼 달콤하다. 게다가 경쾌함에 유쾌함까지 더해진 덕분에 부담이 없다. 정이현의 장편소설을 기대했던 이라면 더욱 즐겁게, 그렇지 않은 이라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알라딘 개인블로그에도 게재했습니다.


달콤한 나의 도시 (예스 특별판)

정이현 지음, 문학과지성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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