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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뭐예요?"
"한 (HAN)."
"아이 이름은요?"
"주연 (JOOYEON)."
질문은 그게 다였다. 그런데 그가 묻는 질문에 대답하다 보니 내 딸의 이름이 그만 '한주연'이 되고 말았다. 원래 이름인 이주연 대신.
"(어, 이게 아닌데?) 성이 '한'이 아니고 '이' LEE예요. 바꿔주세요."
한국과 미국의 다른 성(姓) 제도 때문에 졸지에 나는 자기 이름의 성(姓)도 틀리게 말하는 어리버리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지난 8, 9일은 딸이 다니는 고등학교의 2006-2007 'Fee Day'였다. Fee Day는 새학기를 앞두고 학교에 등록하는 날이다. 이 날은 등록뿐 아니라 수강신청 과목을 변경하기도 하고 학교에 내야 할 돈도 내는 날이어서 'Fee Day'라고 부른다.
딸은 이번 학기에 라커 사용료 5달러를 포함하여 모두 16달러의 돈을 fee로 냈다. 그런데 이런 등록을 마친 뒤 우리나라의 졸업앨범과 같은 yearbook을 신청할 때 바로 '이름 해프닝'이 발생했다.
yearbook 신청을 받는 사람은 엄마와 딸이 당연히 같은 성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내게 성을 물었을 것이다. 나 역시 학부모의 성이 필요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내 성 '한'을 말했던 것이고. 그런데 알고 보니 내 딸의 이름이 그만 엄마의 성을 따라 '한주연'이 되고 만 것.
알다시피 미국에서는 결혼을 하면 대개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된다. 물론 자신의 처녀적 성(maiden name)을 그대로 고집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드물긴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의 경우도 처녀적 성을 그대로 사용한 경우다. 힐러리의 처녀적 이름은 '힐러리 다이앤 로드햄(Hillary Diane Rodham)'이다. 그녀가 빌 클린턴과 결혼하여 힐러리 클린턴이 되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성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여 '힐러리 로드햄 클린턴'이 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지난 4월에 보도된 미 CNN 방송의 여론 조사 결과다. 미국의 유권자들은 '힐러리 클린턴'이란 이름보다 결혼 전 이름을 포함한 '힐러리 로드햄 클린턴'을 사용할 때 더 높은 지지율을 보낸다고 한다.
이런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개는 남편의 성을 따라 'Mrs.아무개'가 되는 것이 미국에서는 일반적이다. 그런데 그게 편리한 점도 있긴 하다. 아이들 성을 알 경우 굳이 부인의 성을 묻지 않아도 Mrs.만 붙이면 얼마든지 예의를 갖춰 정중하게 부를 수 있으니까.
학교 학부모 모임에 참석할 때도 선생님들은 나를 Mrs. Lee라고 부른다. 아이들 성이 이씨이다 보니 당연히 '이씨 부인'이 된 것이다. 여긴 한국이 아니고 미국인만큼 나 역시 자기들 식대로 부르는 것에 딴죽을 걸 생각은 없다. "아니요. 나는 이씨 부인이 아니고 한씨 부인이요. 그러니 나를 한씨 부인이라고 불러주시오"라고.
물론 나와 친한 사람에게는 처녀적 성을 그대로 간직하는 한국의 좋은 풍속을 설명해 주면서 내 성과 이름을 바르게 부르도록 가르쳐 준다.
그런데 문서상으로 이름을 적게 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내가 아무리 '한나영'이라고 적어도 '이나영'으로 바뀌어서 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건강보험에 가입할 때도 나는 분명히 성과 이름을 각각 '한'과 '나영'으로 적었다.
그렇게 적었건만 남편 성이 이씨이다 보다 그만 내 이름이 '이나영'이 되어버린 것이다. 크레딧카드의 경우도 남편과 함께 신청을 했더니 그만 이나영이 되어 돌아왔다.
물론 운전면허증은 개별적으로 신청한 것이어서 내 이름 그대로 '한나영'으로 표기가 되어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엔 내 이름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바뀌곤 한다. 여기에서 내 의지라 함은 나는 내 성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우리와 제도가 다르기 때문에 심심찮게 오해가 생겨서 '한번 바꿔봐?'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성(姓)과 관련하여 또 다른 에피소드를 소개하자면…. 딸이 다니는 고등학교에는 한국인이 손으로 꼽을 정도다. 이곳에는 한국계 미국인인 브라이언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는 방학중인 요즈음 딸과 마찬가지로 밴드 연습을 하고 있다. 지난 주, 내가 자원봉사 학부모로 아이들의 급식을 도울 때였다.
구씨 성을 가진 브라이언이 급식을 받으러 와서는 내 가슴에 적힌 'Nayoung Han'이라는 이름표를 뚫어져라 보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영어로 이렇게 물었다.
"아이 이름이 뭐예요?"
그는 내 딸을 잘 안다. 그리고 자기가 아는 한국 여자애의 엄마가 나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내게 질문을 한 것이다.
"주연."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주연이는 성이 이씨인데…."
"응, 나는 한씨야. 너 그거 모르니? 한국 여자는 결혼해도 남편 성을 안 따라. 처녀적 성을 그대로 갖고 있잖아. 몰랐니?"
그랬더니 브라이언이 다시 이렇게 말했다.
"어, 우리 엄마는 결혼했어도 나랑 똑같은 구씨인데."
'풋'하고 웃음이 나왔다. 아마 그 아이 엄마는 미국에 오래 살아서 미국식대로 남편 성을 따랐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식 사고를 가진 브라이언으로서는 엄마와 딸이 다른 성을 갖고 있는 우리의 '한국식' 배경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고.
그나저나 남편 성을 따르는 이곳에서 내 이름이 '한나영'이 되기도 하고 '이나영'이 되기도 하는 현실이 조금은 복잡하다. 그래서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 '이참에 아예 이나영으로 바꿔봐?'
그럴 때 아이들이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엄마는 '진짜 이나영'과 너무 달라. 그러니 바꾸지 마."
나 역시 이나영으로 바꾸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때로 혼란을 주는 만큼 이곳에 있는 동안은 절충형을 사용할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다. '나영 한 이 (Nayoung Han Lee)'로. 힐러리 로드햄 클린턴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