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이의 방학과제물 중 하나인 <죽은 시인의 사회>를 읽으며 방학도 없이 보충수업을 해야했던 아들아이의 지친 얼굴을 떠올린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웰튼 고등학교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사회에서 제도와 반하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오라는 사실 자체가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덕·체를 골고루 갖춘 전인교육이 사라지고 고등학교가 대학입시를 위한 관문쯤으로 타락한 사회에서 아들아이는 과연 그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상문을 쓰게 될까?
정신의 가치를 이성에만 두었던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이 아니어도 현대인 스스로 시인의 가슴과 심장을 잃어버린 지 오래인 것 같다.
예전엔 누구든 서너 편의 시를 읊조리고 일기장 구석에 자신만의 서툰 감정들을 시로 적어 두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중·고등 시절에 시집 한 권, 소설 한 권 손에 대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
가을이 되면 시집 한 권쯤은 옆구리에 끼고 다니거나 세익스피어 연극 대사의 한 구절, 로제티나 휘트먼 시인의 시를 인용하여 자신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표현하는 것을 멋스러움과 낭만으로 알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알기나 하려는지.
시를 가슴으로 받아들여 감동으로 읽던 세대와 달리 지금 아이들에게 시란 단지 시험을 위한 수많은 과목 중 하나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 같다.
그깟 시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린 것이 무슨 대수냐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는 이미 현대의 기계적인 삶에 길들여져 꿈과 낭만과 가슴 뛰는 삶의 열정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죽은 시인의 사회>는 아이들을 입시 지옥에 몰아넣고 어른들의 잣대로 족쇄를 채워 끌고 가려는 현대의 부모들과 아이들의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웰튼 고등학교는 지금 한국의 특목고나 입시 명문고들이 몰려 있다는 8학군을 연상시킨다.
대학에 몇 명을 입학시켰는가로 명문과 비명문으로 나뉘어지고, 부모·교사·아이들의 위상이 결정되는 세상이기에 아이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대학 입시라는 단 한가지 목표를 위해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십여 년 동안 꿈과, 이상과, 자유를 유보해야만 한다.
폐쇄되고 경직된 웰튼 학교에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존 키팅이라는 국어교사가 부임을 하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내면에 자리한 자유로운 영혼에 눈을 뜨게 된다. 학교의 경직된 규칙에 반하는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비밀 조직을 통해 자각한 니일과 몇 명의 멤버들이 비로소 스스로 사유하며 자신들의 삶의 방향을 선택한다.
만일 내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존 키팅과 같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가 교사로 있어 입시와 상관없이 내 아이의 내면에 자리한 자아에의 갈망에 눈을 뜨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내 자신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책에서는 포장된 부모의 이기심은 자식의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변하지 않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자유로운 항해를 맛본 학생들은 진심 어린 행동을 통해 키팅의 교수 방법이 옳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나 또한 부모의 고착 적인 사고로 니일의 부모와 똑같은 우를 범하고 내 아이들은 현명함으로 자각의 눈을 뜨게 되진 않으려는지.
하지만 진심으로 내 아이가 기계적 사고와 경쟁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닌 음악과 시와 연극이 있고, 시적 공상과 상상력으로부터 과학이 발달되었다는 사실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세상에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죽은 시인의 사회가 아닌 뛰는 심장의 열기를 온몸으로 살아낼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아들아이에게 공부하라는 강요가 아닌 이런 말을 기꺼이 할 수만 있다면….
“아들아! 카르페 디엠(carpe diem·삶을 즐겨라) 현재의 삶을 최대한 즐겨라!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로 네 가슴이 시키는 일을 마음껏 하려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