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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안개 낀 마을 전경. 그러나 오전부터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었다.
새벽 안개 낀 마을 전경. 그러나 오전부터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었다. ⓒ 최훈길
우선 자원봉사 자리가 있을지 걱정이 됐다. 결국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사무소에 있는 봉사활동 담당부서와 연락이 닿았다. 자리는 있으니 내일 오전 10시까지 면사무소로 오라고 하며 상해보험을 들어야 하니 주민등록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첫 차에 몸을 싣고, 각오를 다지다

새벽 5시 20분. 난생 처음 지하철 '첫 차'를 탔다. 오전 7시. 터미널에는 튜브를 어깨에 매고 있거나 박스에 과자를 잔뜩 담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버스 안에도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슬리퍼를 신고 있는 커플들이 눈에 띄었다.

진부면 터미널 도착. 우리 외에는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거리 곳곳에 '수재민 여러분 힘내세요', '평창군민 여러분, 힘냅시다' 등 수해관련 펼침막이 걸려있었다. 면사무소에 들어가자 왼편 구석에 '수해복구지원 종합상황실'이 보였다. 봉사활동 일지에 이름을 쓰고 <오마이뉴스>에서 왔다고 하니 오늘 갈 곳이 진부면 송정1리라고 한다.

강원도 평창 진부면 김종을씨 감자밭에서 수해복구 활동을 하고 있는 나(왼쪽)
강원도 평창 진부면 김종을씨 감자밭에서 수해복구 활동을 하고 있는 나(왼쪽) ⓒ 선대식
담당 공무원이 방금 전에 온 가족도 거기서 함께 일할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다른 사람들도 많이 오냐는 기자의 질문에 "7월에는 매일 2000명 정도 왔는데, 요즘에는 300명 정도로 줄었다"면서 봉사활동은 보통 "토사 제거나 도배 또는 수해 피해 입은 농작물을 수거하는 작업 등을 한다"고 말했다.

파란색 트럭에 빨간색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온 김종을(48)씨를 만났다.

"지금 여기 땅 복구할라꺼먼 돈을 들이부어도 안디요. 면사무소, 산림청에 전화해서 장비 지원해달라고 해도 다 지들 힘없다고만 카고.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디."

운전 중에도 김씨는 복구할 것이 끝도 없다고 말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며칠 전에는 아버지가 더위를 먹어 입원 중이라고 했다. 비포장 도로를 따라 산을 올라가다 보니 콘테이너 박스 두 채가 보인다.

우리 이외에도 7명의 사람들이 먼저 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땅 속에 파묻힌 폐비닐을 꺼내고 나무 조각을 모으는 일을 해야 한다고 한다. 3만평의 밭이 비닐, 나무 그리고 돌덩이로 한데 어우러져 버려 여기가 과연 감자밭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작년 가을에 깔아놓은 비닐이 이번 호우에 싹 쓸려 내려온 거여. 밭에 비닐이 있으면 땅이 숨을 못 쉬니까 일일이 뽑아줘야 혀."

이 마을에서 두 번째로 큰 밭을 일구고 있다는 아저씨는 밭 윗쪽에 모아놓은 비닐과 나무토막이 밭을 덮쳐 피해가 커졌다고 말했다.

피서 대신 자원봉사를 택한 사람들, 왜?

오전 10시. 공사용 장갑을 끼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곳곳에 널린 비닐조각을 집으면 땅 속까지 깊게 연결되곤 했다. 땅을 팠다. 비닐 조각이 보이기만 하면 달려들어 땅을 파고 끌어당기를 반복했지만, 비닐은 조각이 나서 끝없이 나오기만 했다.

"잘 파보면 가락지도 나올겨."

옆집 아저씨를 말을 듣고 다시금 땅을 파 봐도 나오는 건 찌그러진 양철 주전자뿐이었다.

오전 11시. 한 시간도 일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배가 고팠다. 김밥 한 줄 반. 보통 때보다 밥을 더 챙겨먹었는데도 밥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먼저 와서 쉬지도 않고 일하고 있는데 배 고프다는 말을 꺼내기가 미안했다. 물론 배 고프다고 해서 슈퍼마켓도 없는 오지에서 살 수 있는 건 없었다.

어떻게 할까하다 옆에서 나무조각을 줍고 계신 아저씨에게 말을 붙였다. 수다라도 떨면 시간이라도 빨리 갈 것 같았다. 거길 왜 가냐고 만류하는 아내를 뒤로 하고 경기도 평촌에서 왔다는 임낙규씨. 아저씨도 나처럼 군대 제대 후 삽질 해보는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검은 비닐과의 싸움을 벌이다 잠시 쉬는 사이 들이킨 물 한 모금은 정말 꿀맛이었다.
검은 비닐과의 싸움을 벌이다 잠시 쉬는 사이 들이킨 물 한 모금은 정말 꿀맛이었다. ⓒ 선대식
대학생 자원봉사 나왔다고 하니까 대뜸 수능 몇 등급 받았는지부터 물었다. 그리고 함께 온 중학생 아들을 보며 요즘엔 논술, 수능, 면접 등 다양하게 해야 대학가니까 신경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말했다. 아들 교육에 관심이 많다보니 힘든 일이지만 아들과 함께 왔다고 했다.

공태호(포천), 강원선(광명)씨도 2박3일의 휴가를 모두 평창에서 보내러 왔다고 한다.

"인제 가려고 했는데, 차 없으면 오기 힘들다고 하더라. 휴가 때 쉴까 생각하다 어제 다시 마음 고쳐 먹었다."

그나마 며칠 안 되는 휴가인데 이곳으로 온 것이다. TV에서 수해로 힘들게 고생하시는 사람들 보고서 안 올 수가 없다고 말했다. 순간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행없이 혼자 묵묵히 나무를 나르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내일까지 군대 휴가에요. 오늘까지 일하고 내일은 다시 군에 들어가 봐야죠."

봉사를 하고 싶어서 어제 밤에 무작정 평창으로 왔다는 군인 김민우(서울 노원구)씨. 군대 휴가 때 평창에 봉사활동 하러 간다고 하니까 집에서는 "너는 그럴 위인이 못 된다"며 집에서 쉬라고 했단다. 버스 타고 어제 늦게 도착해 PC방에서 밤을 새고 다시 면사무소를 찾아가 이곳에 오게 됐다고 한다.

"봉사하러 왔으면 밥가지 싸오는 게 예의"

12시까지 일하고 드디어 기다리던 점심 시간. 컨테이너 박스 앞에 있는 그늘진 평상에서 땀을 닦았다. 컨테이너 박스 위에는 철근을 구부려 그 위에 검은색 부직포를 덮어 만든 지붕이 있었다. 이것도 컨테이너 박스만 있으면 덥다고 얼마 전에 봉사활동 온 분들이 만들어주고 간 것이라고 한다. 곳곳에 자원봉사자의 손길이 녹아 있었다.

썩은 감자 몇 개만이 이곳이 광활한 감자밭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썩은 감자 몇 개만이 이곳이 광활한 감자밭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 최훈길
산골이라 그런지 30분이 넘어도 밥이 도착하지 않았다. 주인아저씨께서 볶음밥을 주문하셨다고 했는데, 감감 무소식. 연신 얼음물만 계속 들이켰다. 50분이 다 되서야 볶음밥이 도착했다. 그런데 한 개가 모자랐다. 나와 동료 기자는 "우리가 나눠서 먹죠"라고 말을 꺼냈다. 그러면서도 '배가 너무 고픈데 어떡하지. 이걸로 저녁까지 견딜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천에서 오신 아주머니 김인숙씨는 "원래 봉사하러 오면 밥까지 싸오는 게 예의"라고 말하셨다. 생각해 보니 밥 한끼에 목숨 걸 일도 아니었다. 삽 하나 건지지 못하고 수억의 빚까지 진 상황인데, 진정으로 도와주러 왔다면 밥에 집착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커피를 마시자마자 오후 일이 바로 시작되었다. 함께 일하러 온 사람들은 얼굴에 선크림을 바르기도 하고, 목까지 수건을 두르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는 가져온 모자가 없었다. 선크림은 생각도 못했다. 그나마 아주머니께서 평상 저쪽에 놓여있던 모자를 알려주기 전까지는 젊다는 것만 믿고 그냥 땡볕에 몸을 던지려고 했다.

피서 대신 평창 수해복구 활동을 택한 사람들. 군인에서부터 대학생까지 다양했다.
피서 대신 평창 수해복구 활동을 택한 사람들. 군인에서부터 대학생까지 다양했다. ⓒ 최훈길
부천에 사는 김인숙씨는 수해봉사 베테랑이다. 속초, 인제에 들렀다가 세 번째 지역으로 평창에 왔다고 한다.

그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 두 모자가 일하는 모습을 추억으로 남겨드리고 싶었다. 처음엔 괜찮다고 하시다가 "힘든 것도 추억이잖아요"라고 말하니까 그제서야 미소를 지으셨다.

가만히 보고 있던 사람들도 갑작스레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낮술 먹은 것처럼 불그스레하게 얼굴이 그을렸지만 힘든 오늘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은 같았다.

"군에 복귀할 때 사진으로 인화해서 후임들에게 보여주려고 해요."

김민우씨는 얼짱 각도로 셀카까지 찍으며 벌써부터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수해가 우리 마음 속에 남긴 것은...

오후 5시.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흙 묻은 장갑을 벗으며 온몸의 먼지를 털었다. 손톱에 검은 때가 끼어 있고, 하얗던 옷은 아무리 털어도 지워지지 않는 누런색 줄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시외버스터미널까지 차를 타고 오면서 김종을씨는 수마가 할퀴고 간 감자밭을 보여주었다. 아저씨는 감자밭이 비에 쓸려내려갈 때에도 그 장면 모두를 사진기로 찍어 놓았다고 한다.

아저씨는 왜 그렇게 힘들어하면서도 거기를 떠나지 않는 것일까? 이것은 대다수가 바다로 피서를 떠날 때 꼭 여기로 봉사활동을 온 우리의 마음과 같지는 않을까? 힘들지만 그것과 함께 만들어갔던 아름다운 추억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정부는 농경지를 복구하는데 보상비를 지급했으니까 자원봉사는 복구작업에 투입하지 않을 계획이란다. 그래도 내일도 교회에서 1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온다고 한다. 그들도 나처럼 힘들지만 이곳에서 훗날 후회하지 않을 추억을 만들고 갈 것 같다.

작별 인사를 하며 본 아저씨의 붉은 악마 티셔츠에는 '대한민국 파이팅'이라는 하얀색 글귀가 선명히 씌어져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 역시 속으로 되뇌었다.

"수재민 여러분 힘내세요. 파이팅!"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대학생 인턴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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