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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인사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 시인 김기연의 두 번째 시집 <소리에 젖다>가 도서출판 만인사에서 나왔다. 1993년 <한국시>로 등단한 김기연 시인은 지난 2001년에 첫 시집 <노을은 그리움으로 핀다>(북랜드)를 상재한 바 있다.

며칠째 어둑어둑 구름만 앞세우더니 불어난 수위 어쩔 수 없어 그대, 유리창 가득 느낌표로 오네요 독백으로 부풀은 가슴을 열고 자박자박 그 소리 흥건히 고이네요

빛 적시다가 어둠조차 적시다가 휘어진 그 길 따라 그대 문득 돌아선 그 자리 더 넓게 비어져요 달빛 슬몃 들거나 한 올 햇살 심어져 돋아난 푸른 엽맥에 그대의 피 싱싱하게 흐를 테지요
- '봄비' 전문.


인용한 위 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그의 두 번째 시집 <소리에 젖다>는 ‘그대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차 있다. 이 그리움의 정서는 첫 시집에서부터 일관된 것인데, 첫 시집의 그리움이 시적 화자의 고향과 유년 시절의 추억에 집중된 것이라면, 이번 시집에서는 ‘그대’에 대한 그리움으로 주로 나타나고 있다.

시집에 등장하는 ‘그대’는 자목련, 복사꽃, 자운영 등과 같은 꽃이나 봄비, 기차, 강, 달과 같이 다양한 사물로 은유되어 변주(變奏)되고 있다. 이 그대에 대한 그리움은 ‘그대가 내게로 오거나, 내가 그대에게 찾아가는’ 형태로 그려지는데, 그 서술의 핵심적인 시어는 ‘소리’와 ‘젖다’이다. 이번 시집의 제목이 바로 ‘소리에 젖다’이기도 하다.

소쩍새 운다
중모리로 넘어가다
자진모리로 자지러진다
앞산 명치 끝에 터억 걸렸다
뒷산 다 받아넘긴다

소쩍새 울음
명주실꾸리 잡아당겼다 풀어낸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저 노래의 실꾸리

소쩍새 울음 베게 삼아
속 다 비우고 나서야
노래가 된 여자가 있다.
-'다시 소리에 젖다' 전문.


중모리 자진모리로 자지러지는 소쩍새의 울음은 “노래가 된 여자”(시적 화자)의 그리움에 가슴 사무친 절절한 울음이기도 하다. “요량 없이 장대비 맞은/만수위 웅덩이처럼/해종일 출렁이는/나”('방')의 그리움에 사무친 울음, 그것을 시적 화자는 소쩍새의 울음에 실어 노래하고 있다. 그리움에 사무친 소리는 결코 비울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끝없이 그리움의 노래를 부르는 ‘노래가 된 여자’가 될 뿐이다. 노래가 된 여자의 젖은 소리는 시집 도처에 흥건하게 배어있다.

서둘러 핀 봄/찬비에/요량 없이 젖고 있다//어쩌자고/또 어쩌자고/저 여린 속내 들켜/ 찬비에 흠씬 젖는가//봉긋한 내 마음/오래 오래/꽃비 소리에 젖고 있다
-'자목련 젖는 날' 전문.


서두러 우산을 펼쳐들고 저 자목련에게로 달려가고 싶다. 그러나 자목련으로 비유된 화자의 그대 때문에 젖어드는 걸 내가 우산을 펼쳐들고 간다고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네가 없어도/더듬더듬/살기는 살아야지”('눈은 몸의 등불이니')라고 스스로 위로를 하지만 그게 어디 속다짐으로 해결되는 문제인가? 그냥 젖고 젖어서 그리움의 목마름을 스스로 채워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나는 단지 “노래와 울음 사이”에서 노래 쪽으로 걸어가라고 시적 화자에게 말 한 마디 건넬 뿐이다.

소리를 베고 누운 낮달
늪에 빠진 노래 건져내어 뻐꾹새 운다
보리누름 뻐꾹새가 울어서 세상은 캄캄하다
누가 밤새 야금야금 소리 베어 먹었나
통통 배가 불러온 보름달
노래와 울음 사이에 떠 있다.
-'소리를 베어 먹는다' 전문.


소리에 다 젖고 난 김기연 시인이 부를 다음 시집의 노래가 궁금하다. 그리고 만인사에서 펴내는 ‘만인시인선’에는 ‘해설’이나 ‘발문’이 없다. 대신 ‘시인의 산문’이 1편 실려 있는데 독자가 시인의 시 세계로 찾아들어 가는데 소중한 대문 역할을 하고 있다. 시집 뒤에 실려 있는 '소리는 녹슬지 않는다'라는 김기연 시인이 쓴 산문 한 꼭지를 읽으며 시집 <소리에 젖다> 독후감을 끝낸다.

소리에 젖다

김기연 지음, 만인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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