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여겨볼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틀 전이다. 한나라당이 마련한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관련 토론회에서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한나라당이 "청와대의 덫에 걸렸다"고 말한 바 있다.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논란으로 노무현 정부는 '자주' '주권' 등의 이슈를 선점한 셈이고 한나라당은 이에 끌려다니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리고 오늘, <중앙일보>는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가 노무현 대통령의 '대박 상품' 같다고 보도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10%대에 불과한데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찬성 여론은 50% 안팎이라며 "노무현 대통령 특유의 '게임 정치' '역발상 정치'로 이슈를 선점하고 정치권의 주도권을 잡아가고 있다"고 했다.
관전자의 평만 그런 게 아니다. <한겨레>는 한나라당 스스로 '작전상 후퇴'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형오 원내대표가 어제(17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의 4대 선결요건을 제시한 것이 그 증좌라는 것이다. "'선결요건'이란, 말 그대로 이 문제만 해결하면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에 동의할 수 있다는 뜻"이라는 해석이다.
언론이 만든 링에 스스로 올라 펀치 먹다
관전자나 당사자 모두 한나라당 열세라고 판정하고 있다. <중앙일보>의 표현을 빌리면 "노무현 대통령이 만든 게임의 링에서" 아웃복싱(반대)으로 일관하다가 코너에 몰리는 처지가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진단은 반만 맞는 얘기다. 노무현 대통령이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를 '자주' '주권' 문제로 연결시켜 '게임의 링'을 연 건 사실이지만, '링' 그 자체를 만든 주체는 따로 있다.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는 청와대가 불쑥 꺼내든 카드가 아니다. 길게는 십수년 전부터, 짧게 잡아도 참여정부 들어 내내 추진하던 사안이다.
그런 사안을 의제화한 건 언론이다. <중앙일보>를 포함한 일부 언론이 전직 국방장관들의 '반발'을 디딤돌 삼아 '평시 사안'을 '전시 사안'으로 끌어올렸다.
'링'을 만든 건 일부 언론이다. 한나라당은 일부 언론의 지원사격을 과신한 나머지 '링'에 올라 '인파이팅'을 하다가 노 대통령의 카운터펀치에 일격을 당했다. 이렇게 보면 '아웃복싱'을 한 선수는 한나라당이 아니라 노 대통령이다.
이런 평가를 뒷받침하는 주장이 있다. <중앙일보>는 사설에서 "한나라당은 언론에 매달려 살 건가"라고 맹비난했다. 한나라당의 문제는 "언제나 뒷북만 친다는 데 있다"며 "이슈들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 한나라당은 그제야 움직인다, 그 움직임이라는 것도 언론이 제기한 반박이나 문제점을 되뇌는 것이 고작"이라고 했다.
자중지란에 가깝다. 멍석을 깔아준 사람이 멍석 위에서 춤춘 사람을 비난하는 형국이다. 이 자중지란을 보면서 "애초에 멍석깔 자리를 제대로 살폈는지는 왜 돌아보지 않느냐"고 지적하고 싶지만 덮자.
더 큰 관심사는 '퇴로'다. 어떻게 열 것인가?
질서있게 퇴각해야 하는데... 어디로?
<중앙일보>가 제시한 퇴로는 이런 것이다. "전시 작전통제권을 환수하면 예산이 얼마나 더 드는지, 그런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국민을 대신해 따져라."
한나라당도 이를 모르진 않는 것 같다. <한겨레>가 전한 바에 따르면 앞으로는 '반대'를 강조하기보단 '국익' '실리' '경제적 비용' 등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게 한나라당의 계획이라고 한다. 김형오 원내대표가 제시했다는 4대 선결요건이 그 예다.
천문학적인 세금이 들어갈 수도 있는 사안이니까 소요 예산을 따지는 건 당위다. 아니 의무다. 굳이 당부할 사안도 아니다.
짚을 건 그것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파장이다. 한나라당은 과연 '질서있는 퇴각'을 할 수 있을까?
반대를 외치다 갑자기 예산 문제로 돌았을 때, 지금까지 어깨동무해 온 세력에 어떻게 설명할지는 둘째치고 당내 반발을 무마할 수 있을까? 전여옥 같은 의원은 아직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직결된 문제니까 국민투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데 설득할 수 있을까?
설령 질서있게 퇴각을 한다 해도 상황이 모두 해소되는 건 아니다. 어디로 재집결지가 정해지지 않았다.
<중앙일보>는 대통령에 대해서는 10%대의 지지율밖에 보이지 않던 국민이 '자주' '주권'을 제기하니까 절반 안팎의 지지율을 보였다고 했다. 더 나아가 <한겨레>는 한나라당 부설연구소인 여의도연구소의 조사결과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찬성 여론이 84%에 달했다고 전했다.
<중앙일보>의 진단에 따르면 '자주'와 '주권'은 "손님을 가장 많이 끄는 '정치 상품'"이라고 하는데 한나라당은 이런 시장 법칙, 국민 정서를 어떻게 타고 넘을까? 한나라당도 '자주'와 '주권'의 품에 안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