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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왼쪽이 아버지)
학창시절(왼쪽이 아버지) ⓒ 나관호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 땅을 떠나면서 무엇인가를 남긴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은 빈손이지만 이 땅에 크고 작은 흔적과 발자취, 때론 대대손손 기억할 큰 족적을 유산으로 남긴다. 어떤 아버지는 좋은 명언과 교훈을 남기고, 어떤 아버지는 재산, 본보기, 이름, 가치관, 인생관, 신앙을 남긴다. 그리고 어떤 아버지는 부채, 슬픔, 고통을 남기도 한다. 그런 유산 중 제일은 자식이다. 자식은 싫든 좋든 부모의 판박이다.

며칠 전에 날아온 '미납재산세 고지서'가 아버지를 돌아보게 했다. 지금부터 26년 전 아버지는 어머니와 나 그리고 여동생에게 '사람을 도와주고 나누며 사는 인생관'과 함께 자그마한 재산을 놓고 가셨다. 집 한 채와 아버지 고향 충청도에 사놓은 자그마한 전답이다. 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부동산은 어머니와 나 그리고 동생 세 사람의 공동 지분으로 상속을 받았다.

내가 대학교 다닐 때 형편이 어려워 재산을 처분하려고 했었지만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사려는 사람들 때문에 팔지 못했다. 그 후 보람 있는 일에 사용하거나 나의 앞날에 결정적인 일이 있을 때 사용하기 위해 외삼촌에게 모든 것을 위임한 상태로 맡겨 놓았다. 그 과정에서 그 부동산은 외사촌 동생이 유학을 간다며 얻은 은행대출금의 보증용으로 사용되었고, 또 다른 융자를 받는 설정 부동산으로 사용되었다.(외삼촌과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다)

기분좋은 날
기분좋은 날 ⓒ 나관호
그런데 갑자기 외삼촌 내외가 한꺼번에 저 세상으로 떠나셨다. 결국 외삼촌이 사용한 것들은 나의 짐이 되었다. 차마 부모를 졸지에 잃은 외사촌들에게 대출금 갚으라는 소리를 할 수 없었다. 나는 또 다른 대출을 받아 간신히 아버지 유산을 지킬 수 있었다. 10여년이 넘게 대출금을 갚아야 했다. 이것은 어머니도 여동생도 모르는 사실이다.

그렇게 여러 유여곡절을 거치며 25년 지켜온 아버지의 유산을 작년에 어머니와 여동생의 합의 하에 보람 있는 곳에 기증을 했다. 아버지의 깊은 뜻이 아버지의 판박이인 내 속에 살아 있고, 평소 어머니와 동생도 아버지의 유산을 그렇게 사용하길 바랐기 때문에 나의 제안에 잘 따라 주었다.

아버지의 유산은 나에게 있어 무거운 짐과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의 재산 같지 않고 남의 것을 대신 지니고 있는 것 같은 중압감이 있었다. 여동생도 마찬가지 마음이었다고 한다. 작년에 그것을 손에서 놓고 보니 너무 편하고 좋았다. 어디에 그런 마음이 숨어 있었는지는 모른다.

내가 대학교 다닐 때 재산은 있었지만 현금이 없어서 어렵게 생활했던 시절을 떠올려본다. 그때 재산을 팔아 생활했으면 편하기는 했겠지만 내가 돈을 주고 배울 수 없는 '인생과외'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어린시절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하게 살았던 나에게 대학시절 어려웠던 추억(?)은 큰 자산이다. 차비가 없어서 한강을 건너 4시간을 걸어 집에 온 적도 있었고, 종로서적 앞에서 혹시 회수권(버스표)이 땅에 떨어져 있지는 않나 해서 두리번거렸던 기억도 난다. 자존심은 강해서 친구들에게 차비가 없다고 얘기할 수 없었다.

어느 날은 회수권을 땅에서 줍게 해달라고 기도를 다했다. 내 마음을 하늘에서 들으셨는지 바람에 날리는 회수권을 발견해 집에 온 적도 몇 번 있었다. 당시 내가 과외를 해서 받은 돈으로 생활도 해야 했기 때문에 어려웠다. 386세대들에게는 과외 외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기 힘들었던 시절이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을 겪고 나니 어려운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동병상련'. 참 좋은 말이다. 입장 바꿔 생각하고, 입장 바꿔 서로의 현실을 체험한다면 지금 같은 사회 문제가 덜할 수도 있다. 기업 임원들은 노동자처럼 생활 해보고, 노동자는 임원 입장에서 서보는 것이다. 체험해 보지 않으면 진정한 입장을 모른다.

돌아보니 아버지는 손해 보는 삶을 살도록 유산을 남기셨다. 악착같이 남의 것을 빼앗기 보다는 손해 보는 편이 낫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으셨나보다. 다툼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웃지 못할 사건이 많았다. 아버지가 나와 동생의 미래를 위해 준비해 놓았던 교육보험도 보험증권이 사라져 버렸고 누군가 아버지 이름으로 받아갔다. 그리고 아버지가 돈을 꾸어준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수첩을 찾아 갚으라 했더니 오히려 아버지가 돈을 꾸어갔다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성공한 사람들은 우리를 멀리 하고, 남겨 주신 재산을 싸게 사가려는 사람도 많았다. 어느 먼 친척은 아버지 이름으로 된 선산을 자기들과 같이 산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어수선한 사이에 아버지가 그린 호랑이 그림과 도자기, 모아 놓은 옛날 지폐, 신기한 소품들을 모두 집어가 버렸다.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인생을 학습했다. 아버지도 나도 손해는 보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친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버지에게 받은 유산은 외형적으로는 부동산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가치관, 인생관이 진짜 유산이었다. 어머니도 가끔 기억나는 아버지와의 삶을 얘기하신다. 어머니에게 물었다.

"옛날에 나 업고 돈 받으러 다니던 일 기억나세요?"
"나지. 내가 아들에게 길 물어 봤잖아."
"빌려 준 돈 못 받으신 거 생각나세요?"
"나지. 아이고 참. 돈하고 아들하고 바꿨잖아."

어머니가 옛날부터 하시던 말씀이다. 돈은 많이 잃어버렸지만 자식 넷을 잃고 다섯째로 나를 낳았는데 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도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생년월일이 늦다.

부모님을 돌아보니 많이 손해 보신 인생이다. 특히 아버지는 더 그렇다. 어머니 말씀처럼 인생이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인가 보다. 그러나 나는 내 인생길에 있어 자신감이 있다. 그것은 잘나서가 아니라 부모님이 심어 놓은 '손해 본 씨앗'들이 자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천사 같은 좋은 사람들을 꼭 만난다. 그들로 인해 크고 작은 길들이 열리고 진행된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뿌린 씨앗이 자라고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늘은 진실 편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아버지가 남긴 손해 보는 유산을 우리 딸들에게 남기도 싶어 한다. 초록은 동색처럼 말이다.

덧붙이는 글 | 나관호 기자는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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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제이 발행인, 칼럼니스트다. 치매어머니 모신 경험으로 치매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이다. 기윤실 선정 '한국 200대 강사'로 '생각과 말의 힘'에 대해 가르치는 '자기계발 동기부여' 강사,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연구교수이며 심리치료 상담으로 사람들을 돕고 있는 교수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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