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낯설고, 아무리 들어도 억울할 것이다. 국토의 대부분을 일본인들이 차지했고 우리 선조들은 그 국토에서 소작농으로 살았다. 살기 좋은 요지의 땅에는 일본인들이 살았고, 우리 선조들은 살기 불편한 산간지방이나 지저분한 곳에서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여인들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1931년 7월 31일 밤, 부산 초량정 철도곡 관사 15호 다카하시의 집에서 두 여인이 잠자리에 들었다. 집주인인 철도곡 운수사무소 소장 다카하시 마사키는 사흘 전 일주일 예정으로 진주 방면으로 출장을 떠났다. 집에는 갓 스물을 넘긴 조선인 하녀 마리아와 서른여섯 살 안주인 다카하시 히사코 둘만 남았다…
일제시대 살인사건과 스캔들을 추적한 <경성기담> 세 번째 이야기 '난자당한 조선인 하녀, 싸늘히 웃음 짓는 일본 여주인'의 도입부분이다. 이 부분을 읽는 순간 슬그머니 책을 덮어버리고 싶어졌다.
조선인 하녀와 일본인 여주인…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도 이런 종류의 삶을 면치 못했겠지. 왕족이 아닌 이상 십중팔구 그런 운명에 처해졌을 것이다. 일본 사람의 첩이 되거나, 일본 여자들의 하녀 혹은 품팔이꾼이 되었을 식민지 조선여성들의 삶이 떠올라 씁쓸했다. 일제시대에 대한 이야기는 이래서 항상 낯설고 아프다. 가난하고 초라했던 우리 선조들의 삶. 끝없는 약자로서 살아내야 했던 나날들.
<경성기담>은 약자로 살아야 했던 식민지 시대 우리 민족의 삶을 구체적으로 복원해낸다. 평시에도 그랬겠지만 특히 살인이나 범죄가 발생할 때면 조선인들의 인권은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독이 오를 대로 오른 경찰은 걸인을 잡아들여 단서가 잡히지 않으면, 룸펜을 잡아들이고, 그래도 단서가 잡히지 않으면 나병 환자, 간질병 환자... 심지어 과부, 서모, 계모까지 하층민이란 하층민은 죄다 잡아들였다. 서대문경찰서에만 하루 평균 대여섯 사람이 붙들려와 신문을 받았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하층민들은 혐의를 벗은 뒤에도 유치장에 무작정 방치되었다…
사건이 발생했다 하면 무작위로 끌려가는 하층민들. 이 시절에 대해서 일본정부는 아직도 제대로 된 사과나 보상을 하지 않고 있다. 박정희 정권시절,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현금을 조금 원조해주고 지난날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끝내는 것으로 협정을 맺은 것이 유일한 일본의 대응이었다.
그러나 사과하고 보상한다고 해서 그 시절을 살았던 민중들의 삶이 보상될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고, 강간당하고 기만당했다.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은 수많은 민초들의 억울했던 삶들이 이 책을 통해 아우성을 치는 듯하다.
작가는 근대 조선을 뒤흔들었던 살인 사건과 스캔들 10편을 골라 정밀한 고증을 걸쳐 소설 형식으로 만들었다. 상당부분이 당시의 신문기사를 그대로 인용하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썼던 문체와 당시 통용되었던 사고방식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당시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 그칠 뿐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 시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거나 상황과 상황 사이에 놓인 미묘한 역사적 파장 등을 입체적으로 잡아내지 못해서 그저 읽기에 흥미로운 단편적인 역사 에피소드쯤으로 그치고 만다. 단선적인 사건묘사 후에 꼭 따라붙는 교훈적인 단락들도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하다. 순종 임금의 장인이었던 윤택영 후작의 부채 수난기의 마지막 구절을 보자.
…오늘날 신용불량자의 숫자는 4백만에 달한다. 그 사람들 중에는 피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겠지만, 대책 없이 빚을 진 사람도 적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백화점과 술집에는 일단 긋고 보자는 '묻지마 카드족'이 넘쳐난다. 돈이 필요한데 없으면 빌려야 한다. 하지만 빌리기 전에 먼저 갚을 궁리부터 해야 한다. '빚진 돈'은 분명 '내 돈'이 아니다. 현재의 쾌락을 위해 미래를 좀먹지 말자. 명품 가방이 눈앞에 어른거리거든 '황제의 장인' 윤택영 후작의 비참한 도주 행각과 쓸쓸한 최후를 생각하자. 지금 당장 빚을 줄이자…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릴 때 읽었던 도덕교과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물론 생각 없이 신용카드를 쓰지 말자는 것은 백번 옳은 말이다. 그러나 '황제의 장인'의 산더미 같았던 빚과 비참한 최후가 현대인의 과소비에 빗댈 만큼 단순한 것일까.
굳이 교훈으로 마무리 지었어야 했다면 차라리 작가는 황제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주위에서 돈을 빌려다 쓰려했던 그의 옳지 못한 '권력남용'과 그 남용을 가능하게 했던 구시대체제의 한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 않았을까. 조금만 더 입체적으로 조망했더라면,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갔다면 하는 아쉬움. 이만한 소재를 집어낼 수 있었던 작가의 눈썰미가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