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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죽 6조각의 야구모자. 검은 무늬 인조가죽을 이용, 커플 모자로 탄생한다.
인조가죽 6조각의 야구모자. 검은 무늬 인조가죽을 이용, 커플 모자로 탄생한다. ⓒ 한지숙
다리를 다친 덕에 친구들의 안부 전화도 여러 통 받고 잘 쉬긴 했는데, 뒤따르는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8월 중순까지를 기한으로 출판사 동생과 약속한 작업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때를 잘 맞추기로 한다면야, 다리를 핑계 삼아 반짇고리 끌어안을 여유는 더 많았다. 하지만 오히려 붕붕 들뜬 마음은 밖으로만 떠돌았으니 동생에게 도무지 낯이 서질 않는다.

주름을 잡을 때 처음으로 '누드실(투명실)'을 사용했다. 정말 안 보일까.
주름을 잡을 때 처음으로 '누드실(투명실)'을 사용했다. 정말 안 보일까. ⓒ 한지숙
'비가 너무 잦아서….' 물들이는 작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핑계다. (새로 집을 지은 친구에게 커튼과 집안 꾸미기용 소품들을 물들인 천으로 만들어 주겠노라 큰소리 뻥뻥 쳤는데, 모두 곰팡이가 슬며 엉망이 되어 약속을 지키지 못하기도 했으니.)

'빈티지가방'이라 했더니 유치하다고. 다른 모양으로 변형하여 완성. 주머니의 '지시랑' 마크에 비밀이.
'빈티지가방'이라 했더니 유치하다고. 다른 모양으로 변형하여 완성. 주머니의 '지시랑' 마크에 비밀이. ⓒ 한지숙
'너무 더웠잖아….' 방 안에 들어앉아 바늘 꼼지락거리기 힘들었다는 변명이다. (이번 여름처럼 더운 때는 없었다는 동네 어르신들의 이구동성과 전 국민이 시달린 열대야와 폭염을 설마 같은 하늘 아래 사는 동생이 모를 리가.)

옆집 할머니 반닫이에서 얻은 손무명으로 물들인 호두피모자. 봄에 시집갔으니 얼른 하나 더 만들어야.
옆집 할머니 반닫이에서 얻은 손무명으로 물들인 호두피모자. 봄에 시집갔으니 얼른 하나 더 만들어야. ⓒ 한지숙
'다리….' 급기야 최근 생긴 보름 동안의 상처까지 들먹이며 동정표를 얻으려 안간힘을 썼다. (목소리까지 쭈악∼ 깔고 심각한 흉터라도 남은 양 엄살을 떨었으니.)

초컬릿빛으로 탄생한 감물모자. 챙 넓이가 16cm이다.
초컬릿빛으로 탄생한 감물모자. 챙 넓이가 16cm이다. ⓒ 한지숙
예의 그 넉넉한 충청도 말투로 동생이 대꾸한다.

"이러다 겨울 와유. 언니 고생한 건 알겠는데 시간이 언제까지 기다려 주겠어."

이런저런 수다까지 덧붙여 긴 시간 통화를 하고 유예의 시간을 좀 더 받아둔 뒤 전화를 끊고는 혼자 슬며시 웃는다. 예전 직장 동료이자 선후배 사이가 아닌 단순 거래로만 만난 관계라면, 이런 때 얼마나 독촉에 독촉을 거듭하며 나의 목을 옥죄었을까.

감물에 소목염을 한 아사면 블라우스. 알록달록 색실로 스티치도 넣고 물고기단추도 달고. 올여름, 이 옷으로 버텼다.
감물에 소목염을 한 아사면 블라우스. 알록달록 색실로 스티치도 넣고 물고기단추도 달고. 올여름, 이 옷으로 버텼다. ⓒ 한지숙
8월 태풍의 어김없는 행차에도 가라앉을 줄 모르는 더위, 습하고 후텁지근한 기운이 밤낮 가리지 않고 기승을 떨더니만 절기는 못 속이더라. 선풍기를 겹겹이 되돌리지 않아도 자연의 바람 솔솔 넘나드는 산골의 품으로 설익은 가을 냄새가 겨드랑이를 간지럽게 하니 작업에 박차를 가해 몰입하기 좋은 때, 요즘 흥미를 붙여 모자보다 훨씬 빠른 속도를 더해 가는 '옷 만들기'를 보태는 건 어떨까 의향을 떠본다.

역시나 여유롭게 나의 넉살을 맞받아준 동생.

"좋은 생각이네. 모든 걸 일임했으니 알아서 잘 만들어 봐!"

세무베레모. 너무 부드러워 바느질은 더디지만 촉감이 너무 좋다.
세무베레모. 너무 부드러워 바느질은 더디지만 촉감이 너무 좋다. ⓒ 한지숙
동생에게 온전히 만든 것 하나도 없다고 엄살을 떨면서도 나로선 속으로 은근히 믿는 구석이 있었다. 모자와 소품의 디자인은 물론 계절별로 구색을 갖춰 미완(未完)인 것이 꽤 여러 장 되기 때문이다.

모자들을 양면으로 만들 필요도 없고, 염색 천들로만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하면서도 '누구나 따라하기 쉽고 자연스러울 것, 편안하면서도 고급스러울 것'의 조건이다. 어찌 보면 징하게 까다로운, 총체적인 주문이다.

내 머릿속을 웅웅 거리며 떠도는 모자 디자인만도 수십 가지가 넘고, 그것들을 응용해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것도 수백 가지에 이르는데 어떻게 단 몇 마디로 간단히 표현할 수 있으랴.

감물염 자투리들을 이은 나뭇잎 모양의 다포. 손가락이 꽤 고생했다.
감물염 자투리들을 이은 나뭇잎 모양의 다포. 손가락이 꽤 고생했다. ⓒ 한지숙
모자 40여 장을 디자인별로, 계절별로 선보여야 하는 조건. 모시와 삼베, 면을 자르고 잇고, 겨울용 모직에는 털실도 적당히 어우르고. 아! 인조가죽에 실을 꿸 때는 양손 엄지와 검지가 모두 헤져 한동안 밀쳐둔 채 꼴도 보기 싫을 정도였다.

덕분에 힘들여 마련한 소가죽 소품은 엄두도 내지 못할 형편이니 골무를 끼지 않는 습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 좀 해봐야겠다.

모자이야기. 어떻게 변형되어 어떤 모습으로 마무리될지, 올해 안에 세상빛을 볼 수 있을까.
모자이야기. 어떻게 변형되어 어떤 모습으로 마무리될지, 올해 안에 세상빛을 볼 수 있을까. ⓒ 한지숙
그동안 꼭꼭 여며둔 보따리를 들여다 보며 이젠 정말 초읽기에 들어갔음을 실감한다. 올해 안에 배 쑥 내밀며 여봐란듯이 자랑할 수 있을까. 세상 빛에 아울러 출사표를 던지고 동생의 염려와 기대에 웃음 한 보따리 보탤 수 있을까.

나를 향해 주사위를 던진다.

덧붙이는 글 | 가을로 향하는 바람이 코끝을 스치니 물들이고 만들고, 나와의 싸움에 또 빠져듭니다.
느긋하게 기다려 주는 후배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자연을 닮은 사람들(www.naturei.net)', <조간경남>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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