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봐선 열린우리당의 태도가 솔직담백한 것 같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는 태도 같다.
김한길 원내대표가 어제 당 비상대책위 회의에서 밝힌 입장에서도 이런 태도가 묻어 나왔다. 김 원내대표는 "도박성 게임이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 서민의 주머니를 털어가게 만든 정책 실패에 대해 정부는 공식적으로 정중하게 사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자성도 했다. "여당도 책임을 느낀다, 죄송하다"고 했다.
그런데 어째 뉘앙스가 다르다. 청와대에 대해서는 "30조원 규모의 사행성 상품권이 판칠 때까지 민정 등 여러 경로의 경보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한 반면, 당에 대해서는 "몇 달 전부터 사행성 게임과 불법 PC방 문제를 고민하고 특단의 대책을 발표했지만, 문제를 제 때 차단하는 데는 지각"한 점을 강조했다.
청와대는 '엉망'이었고 열린우리당은 '역부족'이었다는 주장이 완곡하게 깔려 있다. 정부는 일을 저질렀고, 열린우리당은 일을 수습하려 했다는 입장도 배어 있다.
본말이 전도됐다는 주장은 이래서 나온다. 할 만큼 했지만 역부족이었다고 자평할 정도로 열린우리당의 귀책 사유가 적은 게 아니다. 사례 두 가지만 나열하자.
▲열린우리당의 강혜숙 의원이 지난해 4월, 경품용 상품권 폐지를 뼈대로 하는 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 문화관광위는 이 안을 말소시켰다.
▲문화관광부가 지난해 사행성 게임물을 도박으로 규정해 일반 게임에서 빼려고 했지만 국회 문화관광위는 제동을 걸었다.
국회 문화관광위의 '역주행' 법안 심사로 올해 4월 28일 게임산업진흥법이 제정됐고, 그 결과 경품용 상품권도, '바다이야기'도 모두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누가누가 못했나' 경연장... 뭘 사과하나?
물론 국회 문화관광위에는 한나라당 의원들도 있고, 민주노동당 의원도 있다. 하지만 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다수를 점한 상임위다. 정당별로 책임의 무게를 저울로 잴 이유조차 없다.
게임산업진흥법이 몇 달 전에 제정돼 경품용 상품권과 도박성 게임의 생명을 연장시켜줬는데, 김한길 원내대표는 열린우리당이 '몇 달 전'부터 문제를 고민하고 특단의 대책을 발표했다고 한다. 당청간 엇박자를 논하기 전에 판단의 엇박자부터 추스를 필요가 있다.
범위를 '정책 실패'에서 넓혀 조망하면 할 말이 더 많아진다. 김한길 원내대표는 '경보시스템'의 심각성을 운위했지만 그 못지않게 심각했던 게 '청탁시스템'이다. 문화관광위원 다수가 경품용 상품권 업자들로부터 후원금을 받은 사실은 이미 공개됐다. 이런 '정상로' 외에 '암행로'가 있었을 가능성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열린우리당은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도대체 뭘 사과하라는 것인지, 초점이 없다.
'정책 실패' 문제의 경우 문화관광부와 영상물등급위, 국회의원들이 뒤엉켜 '누가누가 덜 못했나' 경연을 벌이는 상황이다. 어떻게든 '피박'은 면해보려고 조그마한 '낱장' 변호거리까지 찾아 챙기는 판이다. 도대체 뭘 특정해 사과하라는 것인가?
상황이 여물지 않은 상태에서 내놓는 대국민 사과는 기껏해야 정치 도의적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하지만 국민 여론은 그런 한가한 사과를 받아들일 만큼 여유있지 않다.
어차피 예행연습 사과... 잔꾀부리지 마라
국민 여론만이 문제인 것이 아니다. 절차상으로도 맞지 않다.
이제야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고, 감사원이 조사에 들어갔다. 성인오락실 사태의 사실관계는 이 두 트랙 조사를 통해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대통령의 사과는 이 두 조사 결과가 나온 뒤에 하는 게 순리다.
청와대의 말마따나 "어디서,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잘못됐는지"를 알아야 사과를 할 수 있다. 입발림 수준을 넘어 책임을 묻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과를 하려면 그런 절차를 밟는 게 온당하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3일 4개 언론사 논설위원들과 만나 경품용 상품권 문제를 언급하기를, 정책적 오류를 조정하지 못한 문제는 있지만 "청와대가 할 수준은 아니다"고 했다.
노 대통령의 이런 상황인식을 고려해도 서둘러 대국민 사과를 할 필요는 없다. 정말 정책 오류 수준에 불과한 것이었는지, 청와대가 할 수준은 아니었는지부터 가리는 게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의 대국민 사과 요구는 응급처방에 불과하다. 어차피 제2·제3의 대국민 사과를 위한 예행연습에 지나지 않는다. 일단 정치적 숨통을 열어보자는 '잔꾀'의 성격도 띠고 있다.
하지만 국민 정서는 그렇게 너그럽지 않다. 립 서비스에 매료될 만큼 국민 정서와 여론이 붕 떠 있는 게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