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혹까이도조선초중고급학교에 있는 은령나무
혹까이도조선초중고급학교에 있는 은령나무 ⓒ echofilm
"내가 태어날 때부터 사랑하는 조국은 둘이었네!
이 땅의 역사가 서로를 갈라도
마음은 서로 찾았네 불렀네.
볼을 부빌까 껴안을까 꿈결에 설레만 가는 우리
처음 보아도 낯익은 얼굴아
가슴에 맺힌 이 아픔 다 녹이자
함께 부르자 다 함께 부르자
이 기쁨을 누구에게 돌릴까
이 노래를 이 춤을 이 희망을
내일의 우리들에게"

- 김지석 작사, 윤영란 작곡의 '하나 아리랑'


한국과 일본, 그리고 재일 청소년들이 지난 7월 28일부터 8월 1일까지 도쿄에서 모여 캠프를 하였다. 아이들의 힘으로 평화의 역사를 만들어가자는 취지로 열린 이 캠프 둘째 날 밤, 재일 청소년들은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며 조은령 감독의 영화 <하나를 위하여>에서 흘러나온 김지석 작사, 윤영란 작곡의 '하나 아리랑'을 부르고 있었다.

제7회째를 맞이하는 '아힘나 캠프'는 올해 1월부터 한·일·재일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하여 착실히 준비를 하였다. 이 캠프는 한국의 아힘나 운동본부와 일본의 도롱코노쿠니(흙투성이의 나라)와 일본 NPO법인 'Ahimna Peace Builders'가 공동으로 준비하였다.

서로 문화가 다르고, 일하는 방식도 달라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아이들을 '후지의 숲'에서 맞이 하였다.

ⓒ 김종수
아힘나 평화학교 아이들과 올해 7월 한차례 만난 규슈조선중고급학교 중2 아이들 세 명(조보미, 리규철, 김리실)이 방학을 맞아 아힘나 캠프에 참여하였다.

아이들은 서울에 가는 것보다 더 많은 교통비를 지출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한 번 만난 고국의 아이들이 그리워서 비행기를 타고 도쿄 외곽, 니시다마군에 있는 '후지의 숲'까지 찾아온 것이다.

일본 사회 속에서 재일조선학교는 길게는 6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민족교육기관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에 학력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재정지원 역시 전혀 없다.

그러나 우리 동포들은 "역시 우리 말과 글을 가르쳐야 한다"며 민족교육 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있다. 이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해외에서 3∼4대를 넘어가더라도 우리 말과 글, 민족의식을 잃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 김종수
그런 탓이었을까? 고국에서 자기 학교를 방문한 한국의 청소년들을 바라보는 우리 재일 교포 아이들의 얼굴에는 한마디의 말이라도 서로 나누고 싶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힘나 아이들이 건네 준 명함을 받아들고 꼭 편지를 하겠노라고 다짐하며 좋아하는 순박한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헤어지기 아쉬워했던 아이들은 한 달 뒤, 도쿄에서 열리는 아힘나 캠프의 소식을 접하고 후쿠오카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것이었다.

규슈조선중고급학교의 보미,리실,규철
규슈조선중고급학교의 보미,리실,규철 ⓒ 김종수
무엇이 이 아이들을 이토록 그립게 한 것일까?

캠프를 마치고 떠나며 헤어짐의 슬픔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그 모습을 보면 뭔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그 무엇을 되찾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캠프가 끝난 후 보미와 규철, 리실이는 고국의 아이들과 선생님들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받아 본 것도 오랜만의 일일 뿐 아니라, 또한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보내 본 기억도 가물거렸다. 이 아날로그 방식의 편지나눔으로 인해 한국의 아이들과 선생님들은 우리 동포청소년들의 '그 놓을 수 없었던 그 무언가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에 포로가 된 기분이었다.

"설마 다시 만날 수 있을 줄 몰랐어요"
규슈조선중고급학교 중 2 참가자

▲ 캠프 둘째날 아침, 평화수업에 참여하고 있는 조보미
ⓒahimna

뵙고 싶은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계시죠? 우린 다 잘 있어요.
아힘나 캠프는 너무너무 즐겁고 재미있었어요.
설마 다시 만날 수 있을 줄 몰랐으니까 너무너무 기뻤구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되었어요.

친구들은 잘 지내지요?
다들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
캠프에서 친구들과 보낸 시간은 참 편하고 행복했었어요.

---------------------------------------------------------

보고 싶은 동현에게
동현아, 힘있게 잘 지내고 있지?
누나들은 잘 있어.
너희들이 누나에게 큰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었어. 고마워.
근데 동현아, 너는 글씨를 또박또박 잘 쓰더구나.
누나도 너처럼 우리 글을 잘 쓸 수 있도록 글씨연습 잘해야겠다.^^
너무 보고 싶은 동현아,
우리 서로 편지 많이 쓰고 잊지 말자.
그리고 다음에 꼭 만나자, 안녕! / 조보미


오랫동안 캠프를 함께 준비하였던 아힘나 평화학교의 김현철군은 캠프를 다녀와서 아힘나 평화학교 인터넷 카페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아, 일본 친구들…, 그리고 재일 친구들

김현철(아힘나 평화학교 중학과정 1년)

2006년 7월 28일부터 8월1일까지 일본 도쿄 후지노모리에서 한국, 일본, 재일 조선인 친구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평화 캠프가 열렸다. 이 캠프는 한국의 아힘나평화학교 학생들과 일본의 도롱코노쿠니(흙투성이의 나라), 그리고 재일 조선인 청소년들이 함께 만들어 간 바로 '아이들의 힘으로 만들어 가는 나라'였다.

이번 캠프에서는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일본 친구들은 그전에는 아주 다 나쁘게만 보았는데 이번 캠프를 통하여 더 가깝게 지낼 수 있었고, 또 일본사람들이 다 나쁜 것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려는 정치가들이 나쁘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앞으로 일본친구들을 더 많이 나의 친구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일본 전통북을 연주하는 히노하라다이꼬의 아이들
일본 전통북을 연주하는 히노하라다이꼬의 아이들 ⓒ 김종수
그리고 재일 친구들을 만나서 너무 기뻤다. 처음에는 지난 6월 후쿠오카를 갔을 때 재일 친구들의 학교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친구들이 아주 반갑게 맞이해 주었었다. 그런데 이번 캠프에서 다시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이었다. 다시 만난 재일 친구들은 아주 큰일들을 했다. 그것은 우리가 일본 친구들과 말이 안 통하니까 재일 친구들이 언제나 정답게 우리의 통역을 해 주었다.

헤어짐의 시간. 눈물을 참지 못하는 조선학교친구들
헤어짐의 시간. 눈물을 참지 못하는 조선학교친구들 ⓒ 김종수
지금도 잊지 못할 것은 헤어질 때 너무나도 아쉬워서 눈물을 그치지 못하던 재일 친구들…. 정말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나 자신이 많은 반성을 하게 된다. 캠프가 끝났어도 핸드폰으로 몇 번이나 연락을 하며 "잘 있느냐, 겨울에 한국에서 열릴 캠프에 다시 만나자!"는 문자가 계속 날아오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겨울방학이 2주밖에 안 되는데, 재일 친구들은 얼마 전 편지에서 방학 시작하자마자, 한국의 안성으로 와서 아힘나 평화학교에서 방학을 보내고 싶다고 하였으며, 부모님으로부터도 허락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들은 재일 친구들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그리고 겨울캠프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든 것을 아힘나 평화학교 친구들과 시민총회를 통해서 많이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재일 친구들을 다시 만나서 펼쳐질 아힘나 겨울 캠프가 기대된다.

아이들이 만들어 간 평화로운 만남
한신대학교 평생교육실습 보고 중

▲ 한국*일본*在日의 캠프스텝들
ⓒAHIMNA

처음 캠프를 준비하기 시작할 때는 정말 몰랐었다. 하나의 캠프를 만들고 참여하는 일이 이토록 힘들고 어렵고 진지하며, 보람과 기쁨,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일이었는지. 단순히 프로그램을 짜고 일정을 조정하며, 준비물품 등을 챙기고 준비하면 되는 줄 알았었다.

하지만 실습 기간에 캠프 안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 필요한 것은 정작 단순한 프로그램과 물품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호기심, 열정, 화합, 갈등, 화해, 기쁨, 아쉬움 등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이러한 것들이 캠프에 녹아들어 있어야 했고, 또 표현되어야 했다.

캠프를 시작하면서 단순한 참여자가 아닌, 기획자로서 캠프가 어떤 모습으로 진행이 될까 하는 것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 걱정, 기대 등이 있었다. 물론 세세하게 여러 가지를 준비했지만 그 중에서 분명히 놓친 것들로 인한 문제점이, 캠프에선 여실히 드러났다.

하지만 그건 어른들이 느끼는 '한계이며 문제'였을 뿐,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틀에 박힌 사고 속에서 행동하던 우리들은 아이들과 어울리는 동안 그 틀이, 경계선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나이를 초월했으며 국적을 초월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쓴다는 벽을 넘어 우리는 대화를 나눴으며 마음으로 서로 이해하고 하나가 되었다.

3박4일이 너무너무 짧다고 느껴질 만큼 매 순간순간이 빠르게만 흘러갔고, 서로가 서로를 안고 또 안아도 모자랄 만큼, 서로에게 '잘 가'라는 인사 대신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담아 '또 만나'라고 인사할 만큼 헤어진다는 것이 그렇게나 아쉬웠다.

기획한 자신도 놀랄 정도로 모든 참여자들이, 아니 '후지의 숲'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캠프에 녹아들었다. 충분히 즐기고 있었고 서로 가족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처음에 캠프를 준비하며 녹여 넣고자 했던 화합이나 아쉬움 등이 지금 여기서 이뤄지고 있구나 하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캠프를 기획한 사람이 이뤄낸 것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것을.

무엇을 느꼈느냐고 한다면, 그건 아마 감정들일 것이다. 보고 싶은 마음들이 생겼고, 아쉬운 마음이 한없었으며,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져만 갔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욕심'이 늘었다는 것이다. 더 잘 살아야겠다는 욕심이 생겼고, 더 많이 알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으며, 얘기하고 싶고 공감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사람에 관한 감정들과 욕심들.

1923년에 있었던 일본 관동 대진재 조선인 학살사건의 증언을 위해 캠프를 찾은 할머니. '증언'이라기보다는 손자 손녀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시듯 모습으로 한 마디 한 마디를 깊게도 내뱉으시던 그 모습에 삶에 대한 욕심이 생기고 애착이 생긴다.

캠프가 끝나고 다시 일상이지만, 다시 보는 사진 한 장 한 장이 소중하고 그때의 감정들이 그토록 간절해지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그 '캠프' 안에서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만남이 소중했고 생활이 즐거웠으며 헤어짐이 슬펐던 우리가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면서 바라기는, 다시 한 번 캠프를 통해 모이고 만나며 다시 한 번 즐거워질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 권택일·박경하(한신대 영문과)

덧붙이는 글 | 아힘나 평화학교는 경기도 안성 삼죽면에 있으며 평화를 위해 살아갈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세워진 학교이다.(http://www.ahimna.net / 031-674-9130)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기억과 평화를 위한 1923역사관 관장 천안민주시민교육네트워크 공동대표 1923한일재일시민연대 상임대표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