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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각에서 내려다본 구강포
천일각에서 내려다본 구강포 ⓒ 김정봉
백련사에 가려면 강진읍을 벗어나 구강포를 끼고 남서쪽으로 돌아가야 한다. 구강포는 탐진강을 비롯한 아홉 골의 물길이 모여 만들어진 강진만의 다른 이름이다.

구강포의 물길이 만들어 낸 길을 따라 다산초당에서 강진읍까지 이어지는 20리길은 다산이 유배시절에 다녔던 길이다.

이 길은 20대의 다산이 서울로 가기 위해 생가(生家)가 있는 마재마을 앞의 소내섬을 건너 두미로 향하던 길이 연상되는 길이다. 다산은 구강포를 볼 때마다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형 약전을 그리워했다. 두미협은 다산이 형 약전과 함께 천주교를 처음 접하게 된 역사적 장소이고 자신과 약전 모두 이에 연루되어 유배객의 신세가 되었으니, 이 길을 걸을 때마다 그 때를 회상했음 직하다.

두미협이 팔당댐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듯이, 구강포는 거듭된 간척사업과 제방이 건설되면서 예전의 번성했던 영화는 사라지고 맛조개, 꼬막 등을 줍는 주민들과 겨울철새의 보금자리 역할을 하는 소박한 곳으로 변했다.

백련사와 다산초당은 만덕산 이쪽저쪽 자락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구강포를 곁에 두고 있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은 산길로 걸어서 가려면 30~40분 정도 걸린다. 백련사-다산초당 고갯길은 '다산의 숲길'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다산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답사길이 되었다.

지금은 숲길이 말끔히 정비되었다고 하나 예전엔 풀섶을 가르고 몇 군데 진흙탕에 빠져야 했다. 초당에서 백련사 길을 택하는 것이 더 걷기에 편하다.

백련사에서 내려다본 구강포
백련사에서 내려다본 구강포 ⓒ 김정봉
백련사에 거처하던 혜장선사와 다산이 처음 알게 된 해는 1803년 봄. 다산이 강진에 온지 1년여만으로, 백련사에 봄소풍을 갔을 때 혜장을 만났다. 그 전까지 다산은 교류할 만한 사람을 찾지 못하고 홀로 지내고 있었다. 혜장은 다산에게는 외로움을 달래 주고 토론의 상대자일뿐만 아니라 때론 학문적 자극을 주는 존재였다.

다산이 혜장을 알고 지낸 지 5년 뒤(1808년) 거처를 다산초당으로 옮겼다. 그 이후 혜장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약 3년간 초당에서 백련사까지 만덕산 고갯길을 넘나들며 교류하였다.

백련사는 다산초당 때문에 더 잘 알려졌지만 다산초당이 세워지기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사력이 깊은 절이다. 백련사는 신라 문성왕 1년(839년)에 보령 성주산문을 연 무염선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니 절의 역사는 길고 창건한 분도 여느 분이 아니다.

대웅전 서쪽 한켠에 서있는 백련사 사적비는 백련사의 사력(寺歷)을 말해준다. 비석은 숙종 때의 것이지만 돌거북과 머릿돌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백련사에서 제일 오래된 유물이다. 백련사는 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하였고 고려 고종19년(1232)에 일어난 참회와 정토를 강조한 백련결사운동은 송광사의 정혜결사운동과 함께 고려 후기 불교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것이어서 그 당시 백련사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백련사 사적비. 비석은 숙종 때의 것, 돌거북과 머릿돌은 고려시대의 것이다.
백련사 사적비. 비석은 숙종 때의 것, 돌거북과 머릿돌은 고려시대의 것이다. ⓒ 김정봉
백련사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동백 숲만 보더라도 백련사는 보통 절이 아님을 느끼게 해준다. <동국여지승람>에서도 백련사의 절경을 얘기하면서 동백이 곁들여서 사계절 한결같은 절경이라 했으니 백련사와 동백은 둘을 갈라서 생각할 수 없다.

동백나무 숲길, 백련사와 동백 숲은 둘을 갈라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연을 맺은 지 오래다.
동백나무 숲길, 백련사와 동백 숲은 둘을 갈라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연을 맺은 지 오래다. ⓒ 김정봉
동백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벗어나면 몇 단의 돌축대가 쌓여 있고 그 위에 만경루가 답답하게 서있다. 보통 누각은 시원한 느낌을 주는데 육중한 몸집을 자랑하는 만경루는 답답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런 느낌은 오래가지 않는다.

만경루. 육중한 몸집이 답답하게 하나 내부에 들어가면 느낌이 달라진다.
만경루. 육중한 몸집이 답답하게 하나 내부에 들어가면 느낌이 달라진다. ⓒ 김정봉
만경루에 올라 구강포의 푸르고 잔잔한 바닷물과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떠있는 파란 하늘을 보는 순간 그전까지의 답답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대신 시원함이 극에 달한다. 절을 지을 때 이런 극적 효과를 노리고 지은 것은 아닌가 하는 우문을 하게 된다.

만경루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과 너무나 다르다. 살짝 문틈사이로 보이는 구강포의 정경과 넓은 마루는 답답한 바깥풍경과 대조를 이룬다. 만경루 현판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인데 예전엔 누 안에 달아놓았던 것을 바깥에 달았다.

만경루 창문을 통하여 내려다본 구강포
만경루 창문을 통하여 내려다본 구강포 ⓒ 김정봉
시원한 바닷물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은 백련사 말고도 다산초당의 동암(東菴)위 언덕마루다. 천일각이 세워져 더욱 운치가 있는데 이 곳도 극적 효과가 나는 곳이다. 산중턱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습하고 어두침침하여 이 곳에 오르면 등줄기에 땀이 자르르 흐르는데, 이 언덕에 오르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천일각은 다산이 살아 있을 때 지어진 것은 아니고 다산이 이 곳에서 자주 구강포를 내려다본 것을 기념하여 나중에 세운 것이다. 그런데 마재 다산생가유물관 안에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천일각이 모형으로 세워져 있었다.

천일각에서 내려다본 구강포
천일각에서 내려다본 구강포 ⓒ 김정봉
천일각은 초당 언덕에서 구강포를 보고 서 있을 때 멋이 있는 것인데 다산이 생존해 있을 때에는 있지도 않은 것을, 그것도 실내에 설치해 놓으면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지금도 유물관 안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일각 대신에 다산이 손수 꾸민 초당 옆에 있는 연못을 유물관 밖에 만들어 놓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만경루 밑에서 고개를 들고 보면 대웅보전 지붕만 살짝 보인다. 그 만큼 대웅보전 앞마당은 넓지 못하여 좀 답답하게 보이기도 한다. 모든 건물이 답답해 보여서인지 대웅전의 네 귀퉁이는 활주로 지붕을 살짝 들어 올려 경쾌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 또한 웃음이 나온다. 몸집 큰 사내가 몸을 작게 보이게 하기 위해 '쫄티'를 입은 것 같아 보인다. 이런 저런 생각에 즐겁기만 하다.

대웅보전. 가운데에 계단이 없는 것도 특이하고 육중한 지붕을 네 개의 활주로 살짝 들어 올려 답답함을 피했다.
대웅보전. 가운데에 계단이 없는 것도 특이하고 육중한 지붕을 네 개의 활주로 살짝 들어 올려 답답함을 피했다. ⓒ 김정봉
기단은 막돌을 허튼층 쌓기로 쌓았다. 언뜻 보기에 막 쌓은 듯하나 자세히 보면 둥근 돌, 모난 돌, 큰 돌, 작은 돌이 제 집 들어가 듯 교묘하게 들어박혀 있다. 대웅보전 현판의 글씨는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대웅보전과 만경루는 영조 36년(1760년)에 큰불로 모두 불타 버렸고 그 이후에 중창된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다.

원교 이광사는 1705년에 태어나 22년간 귀양살이를 하다 신지도에서 1777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유배기간 동안 많은 글씨를 남겼고 그의 글씨를 얻으려고 유배지에까지 많은 사람이 몰렸다고 하니 대웅보전현판 글씨도 이때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세로로 '대웅'을 쓰고 다시 왼편에 '보전'을 쓴 모양도 재미있고 글씨가 어쩐지 떨리는 듯하여 구불구불하다. 추사가 제주도에 귀양가기 전에 대륜사에 들러 원교 이광사의 대웅전의 글씨의 촌스러움을 탓하며 그 현판을 떼어 내라고 했던 일화가 생각나는데 글씨에 문외한이 내가 보면은 추사의 심정을 이해할만한 모양을 하고 있다.

대웅보전 현판. 원교 이광사의 글씨로 떨면서 쓴 것처럼 글씨가 꾸불꾸불하다.
대웅보전 현판. 원교 이광사의 글씨로 떨면서 쓴 것처럼 글씨가 꾸불꾸불하다. ⓒ 김정봉
원교에 대하여 우쭐하여 기세가 대단한 추사의 글씨는 다산초당에서 볼 수 있다. 다산초당의 동암에 '보정산방(寶丁山房)' 현판이 있다. 현판 글씨는 다산이 쓴 시에 추사가 글씨를 쓴 서첩인 '보정산방'의 글씨를 확대·모각해 새긴 것이다. 이 현판글씨는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화재로 소실됐던 다산초당의 동암(東菴)을 1975년 복원하면서 새겨 달아 놓은 것이다.

보정산방 글씨는 다산과 추사가 하룻밤을 묵은 뒤 썼다고 전해지는데, 다산과 추사가 다산의 제자인 황상이 머문 산방을 찾았을 때가 아닌가 추측되며 이 때는 추사의 나이가 30세 전후(다산이 유배생활이 끝나는 1819년이 추사의 나이가 34세)로 판단된다.

보정산방. 추사가 다산과 하룻밤 묵은 뒤 서첩에 쓴 글씨를 확대·모각한 것이다.
보정산방. 추사가 다산과 하룻밤 묵은 뒤 서첩에 쓴 글씨를 확대·모각한 것이다. ⓒ 김정봉
추사가 '보정산방'을 쓴 나이는 제주도에 귀양 갔다 돌아오기 훨씬 이전으로 추측되므로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 놓은 게 이광사'라는 추사의 원교에 대한 태도는 이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본다. 이 글씨를 보고 있으면 다시 백련사 대웅보전의 글씨가 생각이 난다. 추사와 원교의 글씨와 관련한 악연(?)은 해남 두륜산 뿐만아니라 만덕산에도 자리잡고 있다.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원교 이광사 모두 유배객들이다. 세 분이 동시에 만난 적은 없었어도 세분이 남긴 자취는 강진 곳곳에 남아 있다. 불교문화, 유교문화, 토속문화와 더불어 유배문화라는 독특한 문화는 강진을 기름진 답사처가 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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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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