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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쟈쿨레 <도둑같은 자식들> 다색목판화 좌우 각 35 cm x 29 cm 1959 년
폴 쟈쿨레 <도둑같은 자식들> 다색목판화 좌우 각 35 cm x 29 cm 1959 년 ⓒ 이충렬
고향을 떠나는 두 아들이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드립니다. 아버지는 담배 한 모금 들이키신 후, 자식들에게 객지에 가서 몸 건강히 잘 지내고 편지 자주 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겹겹이 이어지는 산 아래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룬 풍경과 아버지의 곰방대…. 이제는 아련히 잊혀져가는 우리 농촌의 옛 모습을 폴 쟈쿨레(Paul Jacoulet 1896-1960)라는 프랑스 화가가 두 장의 판화에 옮겼습니다. 그는 자식을 떠나보내는 아버지의 표정을 섬세하고도 절묘하게 표현했습니다.

ⓒ 이충렬
1959년만 해도 우리나라 인구 중 65%가 농촌에 살았고 농촌 한 가정에 자녀들이 평균 5~6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딸을 제외하면 농사일을 도울 아들의 수는 2~3명이었으니, 이렇게 다 큰 두 아들이 떠나고 나면 아버지로서는 농사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던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 판화 속 아버지의 얼굴에는, 당신 곁을 떠나고 고향을 떠나는 자식들에 대한 원망보다는 자식들의 앞날에 대한 걱정이 가득하고, 두 아들을 바라보는 눈길에서는 아버지로서의 한없는 자애로움이 느껴집니다.

폴 쟈쿨레,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을 '판화'에 담다

프랑스 화가의 작품이지만 그가 아버지를 일찍 여의였기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남달랐을 수도 있고, 또 당시 우리나라의 농촌 현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아버지의 마음이 잘 나타난 표정을 판화에 담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폴 쟈쿨레는 1896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3살 때 아버지가 도쿄외국어대학에 교수로 부임하게 되면서 온 가족이 일본으로 이주하였습니다. 폴 쟈쿨레는 1930년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한국과 일본을 비롯 남태평양군도 원주민들의 인물과 삶의 모습을 수채화와 다색목판화로 남겼고, 우리나라에서는 1934년과 올해 국립중앙박물관을 시작으로 국립제주박물관 등 전국 순회 전시회를 했습니다.

그가 25살 때인 1921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32살 때 어머니가 경성제대에 재직 중이던 일본인 의학박사와 재혼하자, 어머니를 만나러 서울을 자주 오가며 우리나라 사람들과 삶의 모습을 판화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나라를 오가던 그는 1931년 전남 영암 출신 나영환씨를 조수로 맞았고, 1949년에는 나영환씨의 딸을 입양하여 한국인과 한 가족을 이루며 작품 활동을 하였기에 우리나라에 대한 이해가 각별하였습니다.

폴 쟈쿨레는 1960년 당뇨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전작품에 대한 소유권을 양녀 나성순씨에게 물려주었고, 나성순씨는 지난해 말 양아버지의 판화 162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 쟈쿨레의 한국사랑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수난 아닌 수난 당한 폴 쟈쿨레 작품 '도둑놈들'

위 작품의 '도둑같은 자식들'이라는 제목은 의역이고, 직역하면 '도둑놈들'입니다. 조수 나영환이, 아버지의 쌈짓돈을 알겨내어 집을 떠나는 '도둑놈들'이라고 설명을 했기에 제목을 그렇게 정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 작품은 제목 때문에 수난을 많이 당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림은 이런 뒷이야기와 함께 볼 때, 구수한 맛이 느껴질 뿐 아니라 친근감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탁월한 미술사가의 한 명인 이구열 선생은 <우리 근대미술의 뒷이야기>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폴 쟈쿨레는 그의 판화 작품을 전시회를 통해서 판매하기보다는, 1년 단위로 일종의 정기구독을 받아 자신이 1년 동안 만드는 작품을 발송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판화를 '구독'하던 애호가들이 '도둑놈들'인 두 아들이 보기 싫다고 찢어버려, 현재 두 작품이 짝을 이뤄 남아 있는 숫자는 매우 적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니, 매우 독특한 이유 때문에 수난을 당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폴 쟈쿨레 <아들의 편지> 다색목판화 각 29 cm x 35 cm 1938년
폴 쟈쿨레 <아들의 편지> 다색목판화 각 29 cm x 35 cm 1938년 ⓒ 이충렬
밀화빛 장판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아버지가 아들로부터 온 편지를 읽고 있고, 어머니는 무슨 내용인지 대강 알고 있다는 듯 바느질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두 번에 걸쳐 판화로 만들어졌는데, 첫 번째 판의 제목이 '돈을 보내달라는 아들의 편지'였습니다. 따라서 아들의 편지는 돈 보내달라는 내용이고, 그래서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표정에는 걱정이 가득합니다.

아들이 객지에서 돈을 보내달라는데 안 보내줄 수 없으니,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구구절절한 사연을 읽고 또 읽으면서, 이번에는 어느 땅뙈기를 팔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아버지의 표정…. 그래서 이 작품은 폴 쟈쿨레의 판화 전작 도록을 만든 리차드 마일이라는 미국의 미술사가로부터 "부모의 심정을 어떤 말보다 더 서사적으로 표현했다"라는 극찬을 받았고 그의 첫 번째 서사적 판화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폴 쟈쿨레. 비록 우리나라에서 살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 아버지를 비롯해 많은 서민들의 삶의 모습을 나름대로의 이해와 함께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던 또 한 명의 외국인 화가였습니다.

빌리 세일러 <휴식> 동판화 29 cm x 21 cm 1956 년- 1960년 사이
빌리 세일러 <휴식> 동판화 29 cm x 21 cm 1956 년- 1960년 사이 ⓒ 이충렬
농사일이 한가한 겨울, 자식들이 떠나 비어 있는 문간방 벽에는 갈퀴가 세워져있고, 아버지가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며 따뜻한 겨울 햇볕을 쬐고 계십니다. 빈 가슴이 클클하다고 밤늦도록 막걸리를 드셨는지, 아니면 호롱불 아래서 밤늦도록 새끼줄을 꼬셨는지 아버지의 얼굴에서 피곤함과 쓸쓸함이 느껴집니다.

이런 쓸쓸한 아버지의 모습은 아직도 우리 농촌에서 볼 수 있고, 1985년 당시 23살이던 문학청년 오봉옥은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농꾼은'이라는 시로 만들어 <창작과비평사>를 통해 발표함으로써 시인이 되었습니다.

나직하게 불러보는 아부지
너무도 꺼무테테한 얼굴과
깡마르신 어깨 우에
애초부텀 눈빛만이 살아
성가시런 자식놈 뭐가 좋다고
요렇게까지 사셨습니까.

이따금씩 허리가 절리시다고
대갈통이 빠개질 것 같다며
당신 죽으면
빠개진 머리 속은 뭐가 들었나
보시라는 그 말씀들이
실상 가난 가난이 아니겠습니까

쪼그리고만 살았던 일평생
정녕 소원은 무엇입니까
허기진 배 찌꺼기나 드시고
자식새끼 배부르는 거
자식놈 따습게 재우는거요?

인젠 쬐까 있는 밭뙈기도 없이
어쩌자고 팔으셔야만 해놓고
두루두루 흙 한줌씩 살펴보고
흘리시는 눈물은 무엇입니까

- 오봉옥 <농꾼은> 일부


약 12점의 한국소재 동판화를 남긴 '빌리 세일러'

빌리 세일러 <낚시꾼> 동판화 29 cm x 21 cm  1956 년- 1960년 사이
빌리 세일러 <낚시꾼> 동판화 29 cm x 21 cm 1956 년- 1960년 사이 ⓒ 이충렬
이마에 주름이 깊이 파인 할아버지가 강에서 낚시를 하는 듯 등 뒤로 그물이 보입니다. 60년도 초반까지만 해도 한강에는 농어, 메기, 붕어, 잉어, 숭어, 누치 같은 물고기가 많아, 실패나 얼레에 낚싯줄을 감아 고기를 낚는 우리의 전통 낚시법을 사용하는 견지낚시꾼들의 수가 상당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잡는 고기 종류에 따라 그물눈의 크기가 다른 어망을 갖고 다녔다는데, 할아버지 뒤에 있는 어망의 틈새가 그리 좁지 않으니 뚝섬여울에서 줄공치 견지를 하던 분은 아니고, 노량진 부근에서 빙어를 낚던 '노들 낚꾼'이나 흑석동 부근에서 숭어를 낚던 '검은돌 낚군' 혹은 팔당이나 양평 부근에서 잉어를 잡아 생계를 꾸려가던 분 같아 보입니다.

당시에는 이런 견지낚시꾼들이 모여 사는 한강가 마을에는 협동어로를 위한 머리계(두계)라는 조직이 있었고, 그중 경험이 많고 나이든 어른을 '영좌'로 모셔 '영좌 할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하니, 어쩌면 이 할아버지가 한평생 노들낚시로 가족들을 먹여 살린 '영좌 할아버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빌리 세일러는 1903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낸 후 뮌헨에서 미술공부를 했고, 1928년 독일을 떠나 파리에서 2년을 더 공부한 후 45개국을 떠돌며 그림도 그리고, 전시회도 하던 역마살 가득했던 독특한 화가였기에 그의 정확한 사망년도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2차대전 종전 후부터 20여년 일본에 거주하면서, 1956년부터 1960년 6월까지 3번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여 약 12점의 한국소재 동판화를 남겼고, 그의 한국 소재 작품 몇 점은 아이젠하워 당시 미대통령이 소장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빌리 세일러가 남긴 한국소재 작품은, 어린아이, 초등학생, 도시처녀, 시장에서 장사하는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등 주로 인물모습이고 1975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화를 동판화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 중 득의작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은 위의 '낚시꾼'과 시장에서 장사하는 아주머니들의 모습을 담은 2점인데, 이 두 작품은 우리나라 화가들이 그린 비슷한 소재의 작품들과 함께 앞으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백양사 '쌍계루'를 생생하게 표현한 '가와세 하수이'

가와세 하수이 <백양사 쌍계루> 다색목판화  35 cm x 27 cm 1939 년
가와세 하수이 <백양사 쌍계루> 다색목판화 35 cm x 27 cm 1939 년 ⓒ 이충렬
우리나라 '사찰누각의 백미'라고 불리는 백양사 쌍계루에서 할아버지가 단풍으로 물든 비자나무 숲을 바라보며 지나간 세월을 회상합니다.

거울처럼 맑은 작은 못 위에 비치는 누각의 그림자처럼, 당신이 이 세상에 남긴 흔적들을 반추하며, 자식들은 잘 사는지, 아니 내가 그들을 제대로 가르치고 키웠는지, 지난 세월을 바라보듯 그렇게 단풍을 바라봅니다.

이 작품은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판화가의 한 명인 가와세 하수이가 남긴 '조선 팔경' 중 한 점입니다. 그는 백양사 쌍계루 이외에도, 지리산, 금강산, 대동강, 수원 화성 등의 우리나라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판화로 만들었는데, 그중 '백양사 쌍계루'가 가장 서정적인 작품입니다.

일본 화가가 만든 일본 판화지만, 그래도 작품 속에 우리나라 절경 중의 하나인 백양사 쌍계루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진경과 아직도 볼 수 있는 못 위에 비치는 누각의 그림자를 생생하게 담아냈고,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우리들의 아버지의 모습도 편견 없이 예술적으로 잘 표현했기에, 용기를 내어 소개했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이해를 부탁드리며 이번 글을 마칩니다.

덧붙이는 글 | 기사에서 소개한 폴 쟈쿨레의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 아닌, 에디션이 다른 필자 소장작품이기 때문에,  Paul Jacoulet/ ADAGP, Paris-SACK, Seoul 2006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저작권에 해당되지 않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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