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사무총장은) 세계에서 가장 힘든 직책이다(초대 유엔 사무총장 트리그브 할브단 리)."
지난달 24일 유엔 사무총장 1차 예비선거에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1위를 차지했다.
네 명의 총장 후보를 대상으로 실시된 선거에는 안전보장이사회의 15개 이사국이 참여했는데, 반 장관은 모두 12표를 얻었다.
이로써 반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피선의 가능성이 한결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먼저 몇 가지를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유엔 사무총장은 국제공무원
유엔헌장상 사무총장의 지위는 "유엔 사무국의 수석 행정관(chief administrative officer)으로 업무수행에 있어 어떤 정부나 기구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으며 지시를 구하거나 받지 않는 국제공무원"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인의 유엔 사무총장 진출이 국가적 경사이고 최고의 영예일 것은 분명하지만, 유엔에서의 국익 제고와는 별 관계가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눈에 보이지 않는 국익까지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지나친 과잉 기대에 대한 냉정한 접근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유엔 사무총장직은 선출직이지만 실제로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지명하는 임명직이라는 표현이 더 현실에 적합하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의견이 중요하고 역시 유엔에 가장 확실한 지분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미국의 의견이 결정적이다.
세번째는 아시아권 후보가 대세인 것은 맞지만 현재의 후보가 그대로 사무총장이 된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1차 예비투표 후 존 볼턴 유엔주재 미국대사는 "이번 투표를 계기로 새로운 후보가 등장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한 바 있다. 기대감의 표현인지 경쟁을 촉진시키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미국의 국익을 좀더 강화시키는 차원에서의 전략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현 상황이 그대로 10월 결선에까지 이어진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사실 그간의 유엔 개혁 논의에 비춰보면 능력과 자질을 갖춘 여성후보가 가장 유리한 상황이었다.
유엔 사무총장 혹은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
반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피선을 최대한 기대하고 노력해야 하겠지만, 피선에 앞서 우리는 몇 가지 모순된 선택 앞에 한번쯤 고민해야 할 일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입장 정리가 주권자의 입장에서 분명하게 이뤄지는 것이 나라나 반 장관을 위해서 현명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첫번째 모순과 선택의 필요는 사무총장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에 진출할 것이냐이다. 한국은 반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출마와 함께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에도 도전 중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물론 내부적으로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사실상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문제를 놓고 유엔 외교가에서는 두 마리 토끼를 좇고있는 한국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었다.
유엔 안보리 이사국은 유엔헌장 제24조에 따라 5개의 상임이사국과 10개의 비상임이사국으로 구성된다. 임기 2년의 비상임이사국은 총회에서 선출되며 국제평화와 안전유지, 지역적 안배(아시아·아프리카 5석, 동유럽 1석, 중남미 2석, 서유럽 등 기타 2석) 등을 고려해서 매년 1/2을 개선하고 임기만료 후 재선될 수 없다.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 사무국의 수석행정관이다.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은 유엔의 핵심 의결기구로, 국익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다. 유엔 사무총장 진출이 국익과 국가의 영예라는 관점에서 당연히 앞서겠지만, 실용적 관점에서 한 번쯤은 구체적 형량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일본 상임이사국 저지하면서 일본 지지 끌어낸다?
두번째는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선택 문제이다.
얼마 전 주한 미대사관의 한 관계자가 "결국은 일본의 신세를 지려 하면서 왜 그렇게 한일관계를 끌어가는 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유엔 외교가는 과연 한국이 일본의 반대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를 걱정반 기대반으로 지켜보고 있다.
최근의 한일 관계는 ▲메구미 등 납북자 처리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후 대북제재에 대한 이견 ▲야스쿠니 참배논쟁 ▲독도 및 주변 수로조사 문제 ▲최고 지도자 간의 갈등 등으로 한일수교 이래 최악의 상태인 것이 맞다.
또한 지난해 일본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을 포함한 유엔 개혁 논의에서 우리 정부는 소극적 반대 수준이 아니라 '커피그룹'을 구성하는 등 적극적 반대활동을 통해 일본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저지시킨 바 있다.
그러므로 유엔 사무총장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일본의 안보리 진출에 대한 우리의 지지를 약속해야만 한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적 고려 없이 '보통국가화'를 지향하는 일본에 대해 우리 국민이 동의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한번쯤 고민과 선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엔과 미국 사이에 선 사무총장
세번째 문제는 두번째 문제와 맞닿아 있다.
캐나다의 주 유엔 대표단이 지난 2월 14일 각 회원국에 발송한 비공식 자료에 따르면 사무총장 선발과정을 개혁하여 투명성을 제고해야 하며, 원탁회의를 개최하여 질의응답을 벌이고 회원국들의 이해를 제고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유엔 개혁에 대한 사무총장 후보자들의 입장이 분명하게 표현될 것을 요구하고 있는 셈인데, 유엔 개혁의 핵심에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확대와 사무총장의 권한과 재량을 어느 정도까지 확대시킬 수 있느냐 등에 있다.
미국은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지나친 확대를 경계한다. 그래서 일본이 독일·인도·브라질 등과 손잡고 상임이사국에 진출하려 했던 것을 사실상 저지시켰다. 미국은 안보리 사무총장의 권한 강화에 반대한다. 유엔이 미국의 세계전략에 방해가 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유엔 예산분담률이 19.5%로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하는 등 국제사회에 책임있는 역할을 다 하고 있다. 그럼에도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시도가 좌절되자 이에 대한 반발로 유엔의 예산부담 실태를 제기하고 분담비율을 줄여나가고 싶어한다. 미국도 경제적 부담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1국 1표주의'에 의해 자신들의 국익이 침해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모순 사이에서 반 장관의 선택은 어떠해야 할까. 일본의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한 동의는 독일·인도·브라질로 파급될 수 있고, 이러한 경우 미국은 모순된 선택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일본이 동의하면 미국은 따라갈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까지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미국에 동의할 수 있다는 징표는 어디에도 없다.
북한인권결의안 주도해야 한다면
더구나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되기 위해서는 미국의 입장을 충분히 대변할 수 있다는 신뢰관계를 통해야만 미국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선출 이후 사무총장직을 수행하면서 과연 국가간 이해관계 대립시 미국의 편만 들 수 있을까? 대테러전쟁, 이스라엘 분쟁,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 북한과 이란의 제재 문제, 북한 인권 등 국제인권문제 등의 갈등을 어떻게 풀어 가느냐이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에 대해 우리 정부는 기권으로 의사 표현을 대신해왔다. 하지만 사무총장은 그 논의를 주도해야 한다.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국익에 반할 것이고 미국의 이해관계에 충실한 꼴이 되고 만다.
대북 미사일 비난결의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 유엔에서 북한의 핵문제·인권상황, 대북제재문제 등 한국의 특수한 상황은 유엔사무총장의 임무수행에 대한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유엔이 미국과 견해를 달리할 경우 한미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세밀한 점검이 필요할 것이고 사안에 따라서는 이슬람권의 반발 가능성도 존재할 여지가 있다는 점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참여외교, 정보 접근이 먼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기문 외교부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에 진출하는 것이 분명 국익에 보탬이 되는 것은 맞다. 그리고 되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서도 200% 동의한다. 하지만 모든 결정은 주권자인 국민에 의해 이뤄져야 하고, 그 결정에 이르기까지 공정하고 균형잡힌 정보가 제공돼야 한다.
막연한 국익론에 입각한 의사결정은 안 된다. 우리가 꿈꾸는 민주와 시장경제 사회에서의 인간상은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주체적으로 의사를 결정하고 그 결정에 대해 책임을 지는 그런 인간상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보 접근이 먼저다. 다음이 결정이다. 그런 다음 책임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참여정부의 외교정책에 '참여'는 없다는 것이 필자의 일관된 비판이다. 참여정부가 참여외교와 대중외교(public diplomacy)를 지향하면서도 그 전제되는 정보접근 측면에서는 철저한 밀행주의가 판을 친다. 외교정책이 어렵고, 그래서 전문가들만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는 '신화'가 탄생한다.
정보 접근이 가능하다면 '정치의 꽃'인 외교정책에 대한 국민의 선택은 충분히 가능하고, 가능해야 한다. 이제 정보를 나누고, 선택에 대해 얘기할 때다.
덧붙이는 글 | 최재천 기자는 변호사이자 국회의원(서울 성동갑, 열린우리당)으로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