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학교 교정에 핀 목백일홍 -배롱나무라고도 하며 꽃이 백일 동안 핀다.
학교 교정에 핀 목백일홍 -배롱나무라고도 하며 꽃이 백일 동안 핀다. ⓒ 안준철
방과 후 동아리 활동 시간이었다. 출석을 확인하고 함께 나눌 자료를 한 장씩 나누어주는데 네 명의 아이가 약속이나 한 듯이 한 손으로 종이를 받았다. 다음 아이에게 종이를 건네주려다가 말고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다.

"어, 모두 다 한 손으로 받네."

그 말을 들었는지 다섯 번째 아이는 공손히 두 손을 모아 종이를 건네받았다. 내가 빙긋이 웃으며 칭찬을 해주자 누군가 뒤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이 종이 다시 주세요."

뒤를 돌아보니 보미였다. 나는 유쾌한 마음으로 아이에게 준 종이를 되받아 공손히 모아 내민 두 손에 다시 쥐어주었다. 그 사이 잠깐 눈길이 오고갔는데 조금 전과는 달리 더할 수 없이 맑고 평화로운 아이의 눈을 오래 들여다보지는 못했다. 뒤에서 요란을 떨며 재촉하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선생님 저도 다시 주세요."
"저도요."

세 아이의 손이 동시에 내 가슴께에 닿았다. 기분이 묘했다. 아니, 행복했다. 한 장의 삽화라고나 할까? 순식간에 일어난 일들이 마치 한 폭의 그림으로 완성되어 벽에 걸려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때 내 가슴 속에서 일렁이던 그것을 감동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겠는데, 따지고 보면 감동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어른이 건네는 물건을 두 손으로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러니 자칫 이런 식의 대화가 오고갈 법도 한 일이었다.

"허허 요놈들 어디서 버릇없이 한 손으로 받아?"
"죄송해요. 다시 주세요. 두 손으로 받을 게요."
"진작 그러지. 필요 없어!"


이런 경우, 교사는 아이들과의 행복한 교감의 순간을 놓쳐서 안 됐고, 아이들은 버릇없는 아이로 낙인이 찍힌 채 그것을 만회할 기회를 놓쳤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두 손으로 받을 테니 다시 달라는 기특한 말을 했는데도 말이다. 왜 이런 결과가 온 것일까?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그것은 아이들이 보여준 최초의 행동에 방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나는 아이들의 변화된 다음 행동에 방점을 찍었던 것이다. 아니, 그런 변화를 미리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물기를 머금은 목백일홍-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아이들과 함께 꽃감상으로 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물기를 머금은 목백일홍-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아이들과 함께 꽃감상으로 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 안준철
언젠가 보미는 나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다. 수업을 한 시간 빼먹고 싶었는지 양호실에 누워 있으면서 동무에게는 그날 지각을 해서 기합으로 운동장에서 풀을 뽑고 있다고 나에게 말해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었다.

본인이 직접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동무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시켰으니 잘못이 더 클 수도 있었다. 물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거짓말을 만들어 동무에게 전달한 그 과정의 행위가 마음에 걸렸다. 쉬는 시간에 보미를 불러냈다.

"너 양호실에 있었어? 운동장에서 풀 뽑았어?"
"양호실에요."
"그런데 아이들 말로는 지각을 해서 풀 뽑고 있다고 하던데 네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킨 거야?"
"예? 예…."

"왜 거짓말을 했어? 작은 거짓말도 자꾸만 하다보면 습관이 될 수 있어. 앞으로는 선생님에게 거짓말 하지 마. 알았지?"
"알았어요."

퉁명스러운 대답은 아니었지만 한 순간 보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렇게 보아서 그랬는지 아이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 지나간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 받았으니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만, 혹시 아이의 잘못을 지적한 나의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잠시 생각이 모아졌다.

사실 나는 보미가 거짓말을 했다는 행위적 사실에 방점을 두고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을 뿐. 하지만 아이의 표정으로 보아 그런 내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후속조치가 필요했다.

"보미야, 선생님도 옛날에 거짓말 참 많이 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나 싶어. 큰 이익을 본 것도 아닌데 말이야. 아무런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그랬던 것 같은데 나중에 결혼하고 나서도 아내에게 자꾸만 거짓말을 하는 거야. 십년 쯤 됐을까? 적어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큼은 거짓말을 하지 말자고 생각한 것이. 그 후로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 너 그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아니?"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보미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거짓말 하지 않는 거야. 약속할 수 있지?"

손을 내미는 보미의 표정이 금세 환해졌다. 그 표정을 보자 너무도 답이 확실한 수학문제를 하나 푼 기분이었다. 쉽고 간단한 문제를 자칫 틀릴 뻔 했다는 생각에 가슴에 서늘해지면서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다보면 실낱같은 끈을 아슬아슬하게 이어가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보미와의 관계도 그랬다. 그날 거짓말을 한 행위를 나무라기만 하고 그냥 아이를 보냈다면 종이를 한 손으로 받았다가 다시 두 손으로 받겠다고 말한 그런 작은 변화가 가능했을까?

아니, 그것은 결코 작은 변화가 아니다. 나뭇잎에 맺힌 빗방울 몇 개가 모여 머지않아 큰 강줄기를 이루지 않던가.

목백일홍을 배경으로 포즈를 잡은 세 소녀
목백일홍을 배경으로 포즈를 잡은 세 소녀 ⓒ 안준철
어제는 9월이 시작되는 첫날이어서 '행복한 교육실천을 위한 자료'를 만들어 동료교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분회 참교육실천사업부장의 자격으로 자료를 준비하면서 나는 사랑의 방점을 어디에 찍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교사들의 변화된 행동에 방점을 찍되, 그것은 곧 학교의 주인인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어야 했다. 글자 한 자 한 자마다 그런 간절한 마음을 담아 이렇게 문건을 완성했다.

행복한 교육실천을 위한 자료 7

1. 가을은 아이들의 감수성을 키워주기 좋은 계절입니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여름이 이제야 가을에게 자리를 넘기려는 모양입니다. 가을은 아이들의 감수성을 키워주기 좋은 계절입니다. 가을이 시작되는 9월에는 이런 내용으로 종례를 하면 어떨까요?

"오늘 집에 들어가기 전에 하늘을 꼭 세 번 이상 쳐다보세요. 요즘 저녁노을이 정말 아름다워요. 그리고 지금이 가을이잖아요. 그냥 날씨가 추워졌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 가슴으로 가을을 느껴보세요. 그리고 행복을 만끽하세요. 가을이 가고 나서 아쉬워하지 말고. 종례 끝."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아이들이 있다면 늘 야단만 칠 것이 아니라 가끔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을 걸어보는 것도 좋겠지요.

"가을바람이 너무 좋다. 너 집에 들어가기 전에 꼭 이 가을바람을 느끼고 들어가거라. 그리고 행복하고… 여름에는 어서 가을이 왔으면 하잖아. 그럼 가을이 왔으니까 가을을 느껴야지. 언제 가을이 왔다가 갔는지도 모르고 가을이 가버리면 손해잖아. 그래서 전화한 거야. 이 말하려고. 네가 행복했으면 해서."

어느 날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전화 한 통이 세상을 향해 꽉 닫힌 마음의 문을 열게 해주었다는 고백을 듣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금이 아니라면 먼 훗날이라도.

2. 책 읽기 좋은 계절에 두레별로 도서관에서 만나보세요.

요즘 아이들에게 교사로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 중 하나가 한 권의 책을 권해주는 일일 것입니다. 그만큼 문자가 아닌 영상매체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아이들에게 책을 권해주는 아름다운 풍토가 조성되어야한다고 봅니다. 책을 권하기에 앞서 교사가 먼저 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다행히도 우리 학교는 만 권 이상의 양서를 보유하고 있는 도서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책 읽기에 딱 좋은 계절입니다.

"담임을 잘못 만나 책도 읽었다. 책이란 것을 읽어보니 나쁘지는 않았다. 내 인생에 도움이 될만한 것들도 많았다."

한 제자로부터 이런 고백을 듣게 될 날도 그리 멀지 않을 것입니다.


점심시간이 끝나자 바삐 교실로 들어가는 아이들 머리 위로 목백일홍이 피어 있다.
점심시간이 끝나자 바삐 교실로 들어가는 아이들 머리 위로 목백일홍이 피어 있다. ⓒ 안준철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지만 정말 나에게 그런 쪽지를 써서 내게 전해준 아이가 있었다. 담임을 잘못 만나 책도 읽었다고 말이다. 참 재미있는 아이가 아닌가. 오늘따라 녀석이 보고 싶다.

덧붙이는 글 | <평화의 향기>에 기고한 글에 일부 내용을 보탰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