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70년대에 태어나 이른바 '끼인세대'라 불리는 시절을 살아온 총각입니다.
최루탄 냄새 맡아가며 치열한 시위도 해보지 못했고, 머리에 물들여가며 새로운 문화를 과감하게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 어정쩡하게 끼여 자랐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두 가지 문화를 다 접해본 세대입니다.
저는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20대 시절은 도시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를 거쳐 지금은 농민단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제 꿈이 농민운동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세상이 저를 이렇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냥 평범하게 월급 받으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냥 국민의 한 사람으로 잊혀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와는 다르고 살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한 분이 바로 노무현 대통령입니다. 제게는 더없이 고마운 분이십니다.
어린 시절 농사일을 도우며 철없는 마음으로 자랐습니다. 사춘기 무렵에 농촌에서 살고 싶다고 어머니께 말을 하면 어머니는 화부터 내셨습니다.
"부지런히 공부해서 돈 많이 벌어 도시서 살아야지, 이런 촌에서 뭐 볼 게 있다고 여기서 살아?"
하지만 저는 시골이 좋았습니다. 아니 시골보다 흙이 좋았습니다. 흙을 밟고 산다는 것은 나 자신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도 어머니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 제게 지난 일에 대해 깊은 반성과 후회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시골로 오신다는 대통령, 참 고맙습니다
대통령께서도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농사에 대해서도 조금은 아실테지요. 지난 대통령 선거 때 그런 이유로 저는 당신을 지지했습니다. 누가 되든 상관없다고, 아니 투표하러 가는 시간조차 아깝다고 한 번도 투표를 하러 간 적이 없는 제가 이번만은 꼭 투표를 해야겠다 싶어 지난 2002년 대선에서 투표를 했습니다.
그런 제가 지금은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분이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면 더 심한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대통령에게 건 기대는 그런 것이 아니었기에 후회가 드는 것입니다.
대통령께서는 퇴임 후 농사를 짓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참으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직 대통령이 농촌으로 돌아온다'는 것만으로 우리 농촌은 힘을 얻을 것 같았습니다.
과거에 모내기철이 되면 대통령들이 농민들과 함께 모를 심고, 가을이 되면 나락을 베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도 농민이 되겠다는 것으로 이해 했으니까요.
언젠가는 퇴임 후 지낼 집을 알아본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습니다. 농촌에 산다는 것과 농민이 되겠다는 것은 다른 것이지요. 정녕 농민이 되겠다면 퇴임하시기 전에 농사를 지어 보십시오.
청와대 앞마당에 쓸모없는 잔디만 키울 것이 아니라, 고추, 배추, 무, 마늘 등을 심어 보십시오. 대통령께서 물을 뿌리고, 잡초를 뽑아 보십시오. 그런 다음에 농촌으로 가서 농사를 짓겠다고 해야 이해가 갈 것 같습니다.
투사가 된 농민들을 아시나요?
민주주의 사회는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목소리를 낸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다양성을 존중하고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대통령께서는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것들을 배운 지 오래 되어 잊었는지 모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먹고 살기 위하여 몸부림 치는 많은 사람들을 공권력이란 이름으로 막고 있습니다. 힘 없는 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라는 말인가요?
국민의 대다수가 반대하는 미국과 자유무역 협정을 체결하려고 합니다. 무역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좋지만 우선은 나 자신이 살아야 무역을 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내가 먼저 굶어 죽을 판인데 시장에 갈 여력이 있겠습니까?
제가 농민단체에서 일을 하다 보니 여러 농민들을 많이 만납니다. 만나는 농민들마다 한결 같이 주름살 깊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도 주름살은 많지요? 하지만 그 주름살이 농민들의 그것과 같을까요? 연세가 일흔이 넘은 농민들이 자유무역을 알겠습니까? 그 농민들이 골프를 칠 줄 알겠습니까?
농촌에서 태어나 고향을 지키며 오로지 농사짓는 것만 알고 평생을 살아오신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발음도 잘 되지 않는 'FTA 반대'를 외치고, '골프장 반대'를 외칩니다. 1년 전까지만 하여도 농사만 알았던 분들입니다.
농민들을 계몽시키기가 어렵다는 것을 아시고, 농민 계몽의 한 방법으로 펼치신 정책인가요?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 자식들이 데모를 하여 잡혀갈까 걱정했던 분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 사시는 곳에도 TV는 나오겠지요? TV에 비쳐진 분들을 잘 보십시오. 젊은 사람 얼굴이 보이던가요?
나이 일흔에 '골프장반대대책위원장'이라는 직책을 차고 "이거는 전쟁이여"라고 외치는 농민이 있습니다. 조상때부터 터를 잡고 살아온 집을 공단이 들어오면서 쫓겨나야 하는 농민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군대도 아닌 외국 군대가 있어야 할 땅이라며 우리나라 군대와 경찰이 우리나라 농민을 쫓아내는 곳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만 보는 국민들이 있습니다.
국민들이 세상 일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신문을 보면 정치기사를 보기 싫어 뒷장부터 읽습니다. 그랬더니 신문사에서 눈치를 채고 뒤쪽에 사설이니, 칼럼이니 하는 것들과 정치 기사를 올립니다. 그래서 요즘은 가운데부터 이리저리 읽습니다. TV뉴스도 5분이나 10분 정도 지난 뒤에 봤는데, 그것도 눈치를 챈 것인지 정치 관련 뉴스가 중간부터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배운 것이 맞다면,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수록 좋은 나라라고 배웠습니다. 이 말은 정치에 무관심 하라는 말이 아니라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정치가 잘 되어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술자리에서도 정치이야기를 빼면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작전통제권, 자유무역협정, 환경오염, 공장건설, 골프장 건설 등의 문제는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삼삼오오로 모여 열심히 토론을 합니다. 찬성과 반대도 있지만 대부분이 정치권에 대한 불평불만입니다. 국민의 참여도가 그만큼 높아진 걸까요? 대통령께서는 그렇게 좋은 쪽으로 해석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제만 하여도 세상 일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이 오늘은 이른바 '투사'가 되어 옵니다. 어제까지는 신문은 구경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시사 잡지까지 읽으며 전문가가 되어 돌아옵니다.
나이가 많아 젊은 전경들하고 싸우지도 못하면서 혈기만은 젊은이 못지 않습니다. 이분들은 새마을 운동으로 농촌을 바꾸었고,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셨던 분들입니다. 살 만큼 살았다며 목숨을 걸고서라도 싸우겠다고 합니다.
그래도 농사를 짓는 이유...
농민들은 농사를 지어 부자가 되겠다고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농사를 짓습니다. 그렇다고 농민들만 먹고 살기 위해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닙니다. 다 함께 먹고 살자고 농사를 짓습니다. 대통령께서 어느 지역에서 생산될 쌀을 드시는지는 모르나 분명 쌀을 드시는 것은 확실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쌀은 누가 농사를 지은 것입니까? 대한민국 농민이든, 외국 농민이든 농민이 농사를 지은 것입니다. 어느 대기업이 수년간 연구하여 만들어낸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먹고 살기 위해 농사를 짓는데, 그런 농민을 죽이려 하는 것은 왜인가요?
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고, 자연을 살리는 사람들이 농부입니다. 어느 산업이고 다 중요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 농업입니다. 기초가 되고 기본이 되는 농업을 이토록 배척하고, 홀대하는 것은 왜인가요?
먹는 문제는 어느 사회, 어느 단체에서든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군대에서도 사람 목숨보다 식량이 더 중요하고, 어느 지역에 여행을 가더라도 먹을 것부터 먼저 챙기게 됩니다. 그런데 잊혀질 만하면 급식사고가 생기고, 불량식품이 수입되고 있습니다.
국민이 가장 안심해야 할 문제가 가장 불안합니다. 이것도 대통령의 깊은 배려인가요? 항상 긴장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시는 것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