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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자유무역협정)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쟁이 상당히 뜨겁다. 찬성론자들 중에는 FTA가 자기 집단에게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이론적 확신에 기반을 두고 찬성론을 개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자신의 경제적 이익에 반하면서까지 이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FTA가 자기 집단에게 경제적 부를 안겨 줄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점이 있다. 그것은 자기 집단의 현재 경쟁력만을 기준으로 FTA의 미래를 예측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FTA가 체결되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는 자기 계층이 이익을 얻을 것으로 기대된다 하여도, 막상 FTA가 체결되고 나면 상황이 급반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은 한국에게 유리한 산업분야일지라도, 막상 FTA가 체결된 후에는 한국에게 불리한 분야가 될 수도 있다. FTA 체결 이후 미국이 우월한 힘을 바탕으로 새로운 산업 분야를 표적으로 삼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한국에 비해 월등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으므로, FTA 이후 미국의 전략이 변화할 가능성이 있음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FTA 찬성론자들은 자기 산업분야의 미시적 경쟁력만을 판단 자료로 삼기보다는 한국 경제 전체의 거시적 경쟁력까지 판단 자료로 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 차원의 거시적 경쟁력이 하위 분야의 미시적 경쟁력을 규정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계층의 미시적 경쟁력만 고려하고 국가 전체의 거시적 경쟁력을 도외시한 채 19세기판 FTA에 찬성했다가 이후 낭패를 본 계층이 있다. 바로 19세기말의 조선 지주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저명한 경제사학자 김용섭(전 서울대·연세대 교수)의 논문 ‘강화 김씨가(金氏家)의 지주 경영과 그 성쇠(盛衰)’를 통해 그러한 사례를 확인해 보기로 한다. 이 논문은 김용섭의 논문들을 수록한 <한국근현대농업사연구>(일조각, 1992년)에 실려 있다.
참고로, 김용섭은 1960년대부터 일제 식민사관 극복을 위해 노력한 학자로서, 한국 근현대 농업경제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내재적 발전론(일종의 자본주의맹아론)을 체계화시킨 인물이다. 그의 이론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일제 식민통치가 없었더라도 조선은 자본주의사회로 이행할 만한 자체 역량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난 2000년부터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중세농업사연구>, <조선후기농업사연구>, <한국근대농업사연구>, <한국근현대농업사연구> 등이 있다.
김용섭이 한국 근현대 농업사 연구의 기본적 틀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별다른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신의 내재적 발전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거기에 알맞은 사료만 제시한다는 비판이 한국 및 일본의 일부 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한국 경제사학계에서 강력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것이 또 다른 측의 평가다.
그럼, 김용섭의 논문을 바탕으로 19세기판 한·일 FTA에 대한 조선 지주들의 기대와 몰락의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논문은 강화 지방 김씨 가문의 농업경영 문서인 <추수기>(秋收記)를 통해 1851~1933년 기간의 경영상황을 분석한 글이다. 구한말의 정치상황과 일본제국주의의 침탈 과정 속에서 김씨 가문이 어떤 성쇠 과정을 보이는가 하는 것이 이 논문의 규명 대상이다.
강화 지방의 토착 지주인 김씨 가문은 가문의 사회적 지위와 유통 중심지로서의 입지조건 등에 힘입어 경제적 성장을 누렸다. 지금으로 말하면, 유력한 대기업에 비견될 만한 지주 가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가문은 1862년에 발생한 농민항쟁을 계기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흥선대원군 이하응(1863~1873년 섭정)이 부유층에 대한 통제정책을 실시했을 뿐만 아니라, 강화 지방에서 외세와의 전쟁이 빈발하는 바람에 이 집안의 경영 악화는 한층 더 심해졌다. 그런데 여기서 흥선대원군 이하응 시기에 부유층에 대한 통제정책이 실시되었다는 김용섭의 주장에 대해서는 유력한 경제사학자의 반대의견이 있음을 밝혀 둔다. 그러나 이 시기에 지주 계층이 전반적으로 경제적 난관에 직면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악화일로를 걷던 김씨 가문에게 한 가닥의 장밋빛 희망이 제시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실각(1873년)하고 일본에게 시장이 개방(1876년)됨으로써 부유한 지주층이 더 많은 돈을 벌게 될 것이라는 비전이 제시된 것이다. 대원군 실각과 시장 개방(개항)을 계기로 부(富)의 증대를 꾀할 수 있다는 전망은 김씨 가문뿐만 아니라 당시의 지주들이 일반적으로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회 유력 세력의 찬성 여론은 19세기판 한·일 FTA를 성사시키는 데에 주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의 관심사는 1876년 개항의 당위성 여부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항이 조선 지주들에게 어떤 희망을 제시했으며, 이후 그런 희망이 과연 현실화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한·일 FTA가 조선 지주들과의 약속을 지켰는가 아니면 그 약속을 배반했는가 하는 점이다.
지주층은 개항 이후 한동안은 경제적 부를 누릴 수 있었다. 지주층에게 가해지던 대원군 당시의 각종 통제가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개항 이후 일본에 쌀을 수출할 수 있게 되어, 조선 지주층은 새로운 활로를 얻게 되었다. 이 시기에 김씨 ‘기업’의 경우에도 ‘매출액’이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금을 바탕으로 보다 더 많은 부동산(토지)을 사들일 수 있었다. 연구대상인 1851~1933년 기간 중에서 김씨 가문이 가장 성장한 시기가 바로 개항 직후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씨 가문의 호황은 잠시뿐이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지주들의 상황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김용섭의 논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개항 이후부터 1894년까지의 시기 동안에는 일본이 조선 시장을 독점하기 힘들었다. 청나라-일본의 상호 견제 구도가 조선 시장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조선 지주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청·일 양국 상인들의 상호 견제 덕분이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가 조선 무대에서 배제된 이후에는 일본 상인들의 시장 지배력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일본 자본가들은 조선 각지에 농장을 개설하였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에 직접 가져갔다. 이로 인해 조선 지주들의 대일 미곡 수출에 지장이 초래되었다.
일본에 대한 미곡 수출로 경제적 이득을 얻던 조선 지주들에게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 농업 자본가들이 조선 지주들의 역할을 가로챈 것이다. FTA만 되면 일본에 미곡을 수출할 수 있을 것이라던 당초의 기대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이 러일전쟁(1905년)에서 승리한 후로는 조선 지주들의 상황이 더욱 더 악화되었다. 조선 방방곡곡에 일본인들의 농장이 한층 더 늘어갔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조선 지주들의 미곡 수출을 억제하고 자국 농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관세를 무겁게 부과하기 시작하였다. 한국 지주들의 입지는 더욱 더 축소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일무역으로 활로를 모색하던 김씨 가문도 ‘닭 쫓던 개’ 격이 되고 말았다. FTA 덕분에 처음 한동안은 이익을 누리던 지주 계층이 결국에는 그 FTA 때문에 발목이 잡히고 만 것이다.
조선과 일본이 아예 하나로 합쳐진 1910년 이후에는 조선 지주들의 경제적 악화가 날이 갈수록 가속화되었다. 나아가 일본이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접어들면서 조선 지주들의 위기는 그야말로 첩첩산중이 되었다.
독점자본주의 단계가 되자, 일본이 지주 자본가들을 산업 자본가들의 동반자로 인정해 주던 종래의 정책을 버리고 지주 자본가들을 산업 자본가들의 예속자로 격하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지주의 사회적 지위가 격하되어 버린 것이다. 이 시기에 낮은 쌀값, 농업공황, 고율의 토지세가 강화 김씨 가문의 경제적 곤궁을 한층 더 심화시켰다.
그럼, 이 같은 상황에서 강화 김씨 가문은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그 후에도 계속 농업 자본가로 남았을까? 이때 김씨 가문이 내린 선택은 ‘농업을 포기하자’였다. 김씨 가문은 포목상으로 업종을 변경하였다. 할 수 없이 내린 결단이었다.
물론 나주 이계선 가문처럼 새로운 경영방식으로 일제의 농업 침탈을 극복한 지주들도 있었지만, 당시 대부분의 조선 지주들은 김씨 가문처럼 경제적 쇠퇴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강화 김씨 가문의 사례로부터, 또 김씨 가문으로 대표되는 조선 지주층의 사례로부터 오늘날의 우리는 어떤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은 자기 집단의 현재 경쟁력만을 근거로 시장개방 이후의 상황을 예측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시장개방 이후 일본이 주도권을 잡고 나서는 새로운 판짜기에 착수했던 것처럼, FTA 이후 미국이 한국 시장을 장악하고 나면 우월한 힘을 바탕으로 새로운 판짜기를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지금 당장에는 유망한 분야일지라도 막상 FTA가 체결된 후에는 몰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의 일부 산업분야에서 FTA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간에 그것은 그 집단의 자유이겠지만, 한·미 FTA가 과연 자기 집단에게 이익이 될 것인가를 판단함에 있어서 이제는 판단 기준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국가 전체의 거시적 경쟁력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집단의 미시적 경쟁력만 고려하면, 강화 김씨 가문으로 대표되는 조선 지주들처럼 정작 FTA 이후에는 업종 변화까지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 점을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한·일 FTA에 기만당했던 조선 지주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한국 경제 전체의 경쟁력을 판단자료로 하여 FTA의 미래를 점치는 지혜를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FTA에 찬성했다가 나중에 그 FTA로부터 버림받는 비극만큼은 겪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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