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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뒷마당을 지나다가 우연히 누군가 심어놓은 호박을 발견했다.
호박넝쿨이 뻗은 곳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 보니 둥글고 탐스런 열매가 보인다. 탐스럽게 열린 호박 위로 꽃은 이미 시들어 가고 너른 호박잎들은 누르스름해졌다. 이 삭막한 도시에서 저는 열매를 맺느라 얼마나 남모르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었을까? 우리에게는 넉넉한 기쁨을 주지만 자신은 혹독한 여름을 보낸 호박의 모습이 자꾸만 뒤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호박을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할머니가 호박죽을 자주 만들어 주셔서 그 맛이 입에 익기도 했지만 늙은 호박은 보기만 하여도 할머니 품처럼 푸근하다. 가을이면 누렇게 익은 늙은 호박을 가슴에 안고 단단한 껍질을 만지곤 했다. 죽 전문점에 가서도 뷔페식사 자리에서도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호박죽이고 길을 가다가 호박 넝쿨이 양옥집 담장을 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시골 할아버지처럼 벙글벙글 웃음이 나온다.
호박은 색깔이나 모양, 크기에 따라 역할도 다양하다. 애호박은 우리네 식탁의 단골메뉴인 된장찌개의 재료가 되기도 하고 늙은 호박은 호박죽을 끓이거나 가늘게 채로 쳐서 호박전을 부치기도 한다. 어릴 적 겨울날 따뜻한 온돌방에 앉아 호박씨를 까먹으면서 할머니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때를 생각하면 절로 마음이 흥겨워진다.
까칠까칠하고 너른 호박잎을 입맛이 없을 때 잘 쪄서 된장 넣어 싸먹으면 그보다 더 좋은 반찬이 없다. 호박잎에 쌈을 싸서 손자들에게 내미는 할머니의 얼굴, 남편에게 건네는 아내의 얼굴에 어찌 미소를 머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마가 심해 비라도 많이 내리면 피해를 입고 마는 다른 농작물과 달리 호박잎은 물을 많이 머금을수록 더 보드랍고 넓게 퍼진다.
호박은 겉모양이 둥글넓적해서 예쁘지는 않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하나도 버릴 게 없는 채소다. 호박잎도 애호박도 늙은 호박도 저마다의 개성 있는 역할이 있다. 미끈한 다리를 뽐내는 오이나 육감적인 허리와 살이 오른 엉덩이를 내세우는 배추에 비해 둥글고 못났지만 무엇보다도 속이 알찬 것이 호박이다.
우리 조상들은 호박을 귀히 여겨 한창 흥할 때를 “호박 넝쿨이 뻗을 적 같아”란 말을 썼고 뜻밖의 물건을 얻거나 횡재를 할 경우 “호박이 넝쿨째 굴러 떨어졌다”라며 좋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둥글둥글하고 푸짐한 호박의 겉모습 때문에 때로는 못생긴 여자를 놀림조로 ‘호박’이라 일컫기도 한다.
호박을 재배하는 친구의 말에 의하면 호박꽃처럼 정조를 지키는 꽃도 없다고 한다. 호박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은 수정을 하지 못해 그런 것이고 호박은 수정 후에는 절대로 입을 여는 법이 없다고 하니 이 얼마나 강한 지조를 가진 꽃인가?
얼마 전 유화를 그리는 J선배를 만났다.
“제일 그리기 어려운 게 호박이야. 유화는 덧칠을 해서 얼마든지 고칠 수는 있지만 아무리 덧칠해도 호박은 모난 부분이 자꾸만 생기거든.”
둥글고 넓적해서 붓만 대면 쉽게 그려질 것 같다고 반문하자 선배는 말했다.
“호박의 모양이 둥글어서 누구나 둥글게만 그리면 된다고 생각하고 붓을 들지만 막상 그리다 보면 꼭 한 쪽이 찌그러진단 말이야. 어떨 때는 물감 한 개를 모두 다 써 버리고도 맘에 들지 않아 그만두고 싶어질 때도 있어.”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모난 것 쳐내고 둥글둥글하게 만든 것 같은데 나는 또 어느 틈엔가 찌그러져서 모난 내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때로는 호박처럼 둥글넓적하고 뭔가 하나쯤 빠진 듯 어수룩해 보이면 어떤가.
계절은 어느덧 호박이 익어가는 가을이다. 나도 이제는 사소한 일에 신경 곧추세우고 모난 것 보다는 조금은 둥글게 조금은 너그럽게 나를 가꾸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