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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 호두를 둘러싼 열매를 이용해 물을 들인다. 검은 빛으로도 물든다고 한다.
딱딱한 호두를 둘러싼 열매를 이용해 물을 들인다. 검은 빛으로도 물든다고 한다. ⓒ 한지숙

한낮엔 아직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도록 더위가 맴돌지만, 매미 소리가 요란하던 엊그제 풍경과 사뭇 다르게 오늘은 가을의 전령인 귀뚜라미가 밤을 노래하고 뜰의 감나무 그늘 아래엔 소슬한 바람이 살갑게 일렁인다.

마을회관 앞 평상에서 뜨거운 볕을 피하던 할머님들의 구부정한 허리는 어느새 들녘으로 향하고, 나락을 돌보는 손길과 밭으로 향하는 경운기의 탈탈거리는 소리가 부쩍 잦아졌다. 주인 따라 마실 나온 이웃집 염소도 길가의 풀로 점심 끼니를 때운다. 가을로 접어드는 요즈음, 우리 동네 풍경이다.

실크와 면 들을 담가 주무른다. 사진처럼 한꺼번에 많은 옷감을 담그면 얼룩이 생기기 쉽고 곱게 물들이기도 어렵다.
실크와 면 들을 담가 주무른다. 사진처럼 한꺼번에 많은 옷감을 담그면 얼룩이 생기기 쉽고 곱게 물들이기도 어렵다. ⓒ 한지숙

오랜만에 호두 껍데기로 물을 들일 참이었다. 몇 해 전, 천안에 사는 선배가 보낸 귀한 호두 껍데기로 실크스카프를 물들였는데 은은한 인디안 핑크빛이 참 고왔다. 그때 실크스카프 한 장에 어른거린 묘한 어우러짐이 내내 잊히지 않아 호두 열매를 구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태풍이 나무뿌리를 세차게 뒤흔들고 지나간 작년 여름, 화개의 혜림농원에서 내게 건너오라고 연락했다. "호두 껍데기로도 염색을 한다면서요? 비바람에 세 그루 모두 흔들렸는데 주워가시겠어요?"

득달같이 가보니, 수십 년 된 은사시나무며 알알이 열매를 빼곡하게 맺어가던 밤나무, 수만 평 밭을 이룬 차나무로 가득했다. 나무들이 이미 뿌리째 흔들리는 곤욕을 치른 뒤였다.

견과류를 좋아해 즐겨먹는 호두. 호두 나무나 열매를 실제 본 건 작년 여름이 처음이었다.
견과류를 좋아해 즐겨먹는 호두. 호두 나무나 열매를 실제 본 건 작년 여름이 처음이었다. ⓒ 한지숙

견과류를 즐겨먹는 난 땅콩, 잣, 호두를 입에 달고 산다. 시골에 오면서 비싼 잣과 호두는 엄두도 내지 못하지만, 끼니는 걸러도 땅콩 담는 그릇을 비운 적은 거의 없다. 딱딱한 호두의 뾰족한 이마 한가운데를 장도리로 톡 쳐서 한 방에 반으로 쪼갠 뒤, 그 안에 있는 기름지고 고소한 호두를 빼먹는 재미란. 괴산에서 물들일 때도 "호두 껍데기, 호두 껍데기"하고 말만 했지 가까이서 실제 호두를 싸고 있는 짙푸른 열매를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누더기 스카프에 물들이고 모자도 만들었다.
누더기 스카프에 물들이고 모자도 만들었다. ⓒ 한지숙

손에 검은 물이 드니 조심하라는 안주인의 말에 면장갑을 끼고 열매를 손질한 뒤, 마대에 한 아름 담아서 건너왔다. 장도리가 닿으면서 열매에 흠집이 생겨, 자루에도 서서히 검푸른 물이 들고 있었다. 열매를 얼른 쏟아내 삶았다. 실크스카프 몇 장을 주무르고 정련해둔 손무명에 물을 들이니 실크스카프에 물들였을 때와 다른 색조, 보라나 분홍이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묘한 색조를 띈다. 모자랑 다포, 소품 몇 장에 응용해봤다. 독특한 색조의 잔잔하고 은은한 분위기는 역시 기대를 훨씬 웃돌았다.

조금씩 시간 차이를 두어 물들인 세 빛깔의 실크스카프.
조금씩 시간 차이를 두어 물들인 세 빛깔의 실크스카프. ⓒ 한지숙

윗녘에선 좀체 구하기 어려워 호두과자로 유명한 천안표 호두로 염색한 것을 늘 자랑삼았는데, 이곳 하동에 오니 호두 농사를 짓는 농가가 많아 내심 흐뭇했다. 염료를 추출하고 스카프를 담가 주무를 때 이웃 아주머니 두 분이 건너와 신기한 듯 바라봤다. "호두만 빼내 팔고 나머진 모두 버렸는데 이런 물이 들다니 참 곱네…."

'꼬집기 기법'으로 줄기를, '아플리케'로 꽃봉오리를 붙여 만든 홑겹 다포(茶布).
'꼬집기 기법'으로 줄기를, '아플리케'로 꽃봉오리를 붙여 만든 홑겹 다포(茶布). ⓒ 한지숙

이웃 아주머님께서 버리지 않고 잘 말려 모아준 호두 껍데기가 한 자루 그득 남아 있어 염색하려 한 것인데, 작업장이 불편하다 보니 관리조차 뒷전이었나 보다. 비를 피하느라 귀퉁이에 세워둔 자루가 비바람 때문인지, 들고양이들이 건드리며 넘나든 건지, 수챗구멍에 거꾸로 처박혀 자루째 죄다 못쓰게 됐다.

이번에 호두 껍데기로 물들이겠노라고 마음먹은 건, 얼마 전 검은 빛을 내는 염료로서 호두 껍데기를 공부했기 때문이다. 호두 껍데기를 모아주신다는 아주머님의 약속을 또 기다릴 수밖에.

산골에 내리는 밤이슬 속으로 도리깨질 소리가 '타악탁' 이명처럼 울린다. 울렁증이 도진다.

덧붙이는 글 | '지시랑공방(http://www.jisirang.com)'      
'자연을 닮은 사람들(http://www.naturei.net)'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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