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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비밀은 반드시 나쁜 것만도 아니다. 비밀은 인간관계에서 좋은 역할을 할 때도 분명 있다. 서로 지켜야할 비밀도 있고 드러내도 그다지 기분 나쁘지않은 비밀도 있다.
비밀 때문에 사생결단이 나기도 하고 비밀 때문에 더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거나 성숙해지기도 한다. 때론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비밀도 있지만, 빨리 드러나면 더 좋은 비밀도 있다.
부부 사이에도 비밀이 있고, 친구와 친구 사이에도 비밀이 있고, 부자지간에도 비밀이 분명히 있다. 선생과 제자 사이에도 비밀이 있고, 상사와 부하 사이에도 비밀이 있다. 살다 보면 공공연한 비밀도 있고,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는 비밀도 있다.
아내에게만은 꼭 숨기고 싶었던 내 비밀은...
무엇보다도 부부 사이의 비밀이 가장 실감나고 극적인 면이 있다. 인간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이면서 서로 등 돌리면 남남이 되는 관계가 바로 부부다. 그래서 부부 사이의 비밀은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한다.
남편과 아내는 자신의 비밀을 나름대로 잘 관리해야 한다. 현재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비밀이 관리되는 것이다. 물론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하는 비밀도 부부 사이에 있지만, 사소하게 웃어넘길 수 있는 비밀도 부부간에 있다.
치명적인 비밀은 '부부의 위치'를 위태롭게 한다. 불륜이나 비도덕적인 행위와 같은 비밀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남편 몰래 조금씩 저금해온 아내의 비밀통장이나 남편의 귀여운 정도의 비밀계좌는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기분좋은 비밀이다. 이런 비밀이 없는 부부가 차라리 불행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20여년만에 밝혀진 나의 비밀은 사소할 수도 있고, 나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는 비밀이다. 아내와 내가 처음으로 만난 것이 1985년 대학 도서관에서였다. 나는 군대를 막 전역하고 복학준비를 하느라 도서관에 다니는 중이었다. 아내는 대학 2학년이었다.
나의 대학생활은 막걸리집이 먼저인지 도서관이 우선인지 구별되지 않는 생활이었다. 점심 대신 막걸리 한 잔 마시는 것이 훨씬 한계효용가치가 높았던 시절에 처음으로 만났다. 처음부터 사귄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 속에서 이성의 싹이 조금씩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도서관에서의 데이트는 뻔하다. 커피를 자주 마시거나 틈나는 대로 도서관 자리를 잡아주는 '도자기' 수준이었다. 내가 대학교 다닐 때에서는 도서관 자리를 잡기가 참 어려웠다. 새벽 6시에 도서관 문을 열면 도서관 자리가 순식간에 동이 났다. 그래서 여자친구에게 도서관 자리를 잡아주는 남학생을 '도자기'라고 불렀다. '도서관 자리를 잡아주는 기둥서방(?)'이라는 뜻이다.
대학생활을 화염병과 돌멩이 던지느라, 또 틈나면 취업 준비하느라 다 보내고, 지금의 아내와 본격적으로 사귀게 된 것은 졸업하기 얼마 전이었다. 아마 아내는 나의 얼굴과 키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다.
사실 내 키는 큰 편이 아니다. 동시대를 사는 사람의 보통 키라고 나는 강하게 이야기했지만, 고등학교 때 출석번호가 1학년 때 1번, 2학년 때 2번, 3학년 때 1번이었다. 솔직히 2학년 때에도 친구에게 사정 사정해서 2번을 했던 아픈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 때는 키순으로 번호가 정해졌다.
그래서 아내가 키가 얼마냐고 물어보면 나의 대답은 항상 "자네보다는 커"였다. 아내는 긴가민가했지만 지금까지는 그래도 잘 견디어온 셈이다. 물론 아내가 알려고 했다면 진즉에 알 수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방심했다가 아내 앞에서 키 검사
며칠 전에 아내는 의료보험공단에서 실시하는 건강검진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나와 함께 가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다. 나도 건강검진을 해야 했기 때문에 쉽게 그렇게 하자고 동의했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도 굶고 점심도 굶고 오후에 병원으로 갔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거의 비몽사몽이었다. 솔직히 의식이 흐릿흐릿 했다.
사실 나는 '밥심'으로 산다. 밥을 먹지 않으면 힘이 생기지 않는 체질이다. 숨을 안 쉬어도 밥을 먹어야 난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아침을 굶는 사람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밥에 대한 애착이 많다. 그래서 밥을 굶는다든가 건너뛰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 일요일에 늦잠을 자서 아침을 10시에 먹어도 점심은 제 시간에 꼭 먹는 것이 바로 나다.
이러니 굶주림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아마 내 의식의 절반은 행방불명 상태였을 것이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문진표를 작성하고 집사람이 먼저 키와 몸무게를 재는 기계 위로 올라갔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나도 집에서 몸무게를 재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키와 몸무게를 재고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목을 막 늘어뜨리는구먼"하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아뿔싸! 아내 앞에서 내가 키를 재다니.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것이다.
이런 생각도 잠시 뭔가 머리 위를 살짝 건드리고 올라가는 느낌이 있은 후 모든 상황은 종료가 되었다. 바로 0.2cm 차이였다. 0.2cm의 차이는 나에게 20㎝보다 더 큰 차이로 느껴졌다. 바로 나에게는 치명적인 비극인 것이다. 20년 지켜온 비밀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바로 이어지는 아내의 말은 "지금까지 나를 속여 왔네"였다.
기계가 잘못되었다는 둥, 키를 잴 때 자네가 "목을 막 늘어뜨리는 구먼"이라는 말 때문에 목이 움츠러져 1㎝는 손해를 봤다는 둥, 자네 아무래도 신발을 신고 잰 거 아니냐는 둥, 다시 한 번 키를 잴 수 없냐는 둥의 변명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나를 내려다보는 아내의 커다란 두 눈만 있을 뿐이었다.
앞으로 살아갈 일이 걱정이다. 지금의 솔직한 심정은 성장호르몬이라도 맞고 싶은 심정이다. 인터넷에 자주 등장하는 '자녀의 키 10㎝ 더 키우는 법'이라는 배너 광고가 유난히 선명하게 보이는 것도 내 신장의 비밀이 탄로 난 바로 그날부터다. 다행히 아들이나 딸내미의 키는 큰 편이어서 잊고 지내왔던 내 키가 내 인생을 움츠리게 만들고 있다. 아내 앞에만 서면.
아마 아내는 속으로 엄청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이건 완전히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것이다. 나의 '최고의 약점'을 손에 쥔 아내의 인생에는 앞으로 '한 손에는 무기를 다른 손에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이제 난 샅바싸움에서 지고 들어가는 꼴이다. 이를 어찌할꼬? 참으로 난감한 지경이로다.
앞으로 더 키우고 메워가야 할 0.2cm
그날의 건강검진은 정말 피했어야 옳았다. 나의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단지 밥 두 끼를 굶고 나의 확고했던 이성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평소에 아내를 괴롭히며 '밥', '밥'만 외치고 다녔던 나의 업보가 아닐까 한다.
이제부터라도 한 끼의 밥에 목숨을 거는 무모한 짓은 그만두어야겠다. 그리고 0.2cm 부족한 키를 2㎏의 사랑으로 채우면서 살아야겠다.
그래도 이번 건강검진에서 건진 것도 있다. 부부는 닮는다는 말이 정말 맞는가보다. 몸무게는 0.1g도 틀리지 않고 똑같고, 좌우 시력도 1.2와 0.8로 똑같고, 혈압도 120/70으로 같은 것을 보면 말이다. 단지 키에서 0.2cm만 차이가 나는 셈이다.
물론 이 정도의 차이는 나의 사랑과 넓은 이해심(?)으로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다. 그렇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자꾸 떠오르는 아내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나보다 0.2cm나 작으면…."
덧붙이는 글 | 노태영 기자는 익산 남성고등학교 교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