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간의 역사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있다. 이번에 문제가 터진 것은 중국측이 새로운 도발을 가했기 때문이 아니다. 중국은 그동안 아무 거리낌 없이 역사를 계속 왜곡해 왔다.
엄밀히 말하면 이번 문제의 책임은 한국 정부에 있다. 한중관계를 고려하여 문제를 가급적 덮어 두려 한 정부 측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비유를 들면, 강도(중국)가 우리 상점 앞에서 흉기(정치적 대응)를 들고 물건을 마구 훔치고 있는데, 경찰(한국 정부)이 나서서 주인(한국 국민)의 눈과 귀를 막아 온 것이다. 그러면서 경찰은 순리적 해결(학술적 대응)만을 되뇌어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중국 역사교과서 분석 작업에 참여한 바 있는 한 학자는 필자와의 사적인 대화에서 "정부는 역사문제 때문에 외교관계에 손실이 초래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국민들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중국 역사교과서에는 놀랄 만한 내용들이 많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학자의 말에서도 드러난 바와 같이 우리 정부는 그동안 국민을 의식해서 외형상으로는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한 작업을 전개해 왔지만, 실제로는 국민의 눈과 귀를 막는 일만 해 왔던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연구 결과에서 역사왜곡의 심각성이 드러났는데도 그동안 중국 측에 대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관련 정보를 통제하는 데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중국의 역사왜곡으로 인해 국민의 혈세만 추가 지출된 셈이다.
고구려사 문제가 다시 터진 마당에 정부는 2004년 8월 23일 한·중 간 구두양해의 적합성을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2004년 8월 25일자 기사 "이러다 조상을 빼앗길 판국인데 강탈자와 대면해 족보나 뒤적이나" 참조). 이 구두양해는 양국 외무차관급이 합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한·중 역사문제에 관한 한국 정부의 공식 방침을 담고 있다. 5개 항의 구두양해 중에서 핵심적인 것은 제3항과 제5항이라 할 수 있다.
제3항 : 양측은 한중 협력관계라는 커다란 틀 아래서 고구려사 문제의 공정한 해결을 도모하고 필요한 조치를 위해서 고구려사 문제가 정치화되는 것을 방지하는 노력을 한다는 데에 공동인식을 같이한다.
제5항 : 양측은 학술교류의 조속한 개최를 위해 노력하며 학술교류와 양국 국민의 이해증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한다.
제3항에서는 '고구려사문제가 정치화되는 것을 방지한다'고 했고, 제5항에서는 '학술교류를 개최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당시 한·중 양국은 고구려사 문제를 학술로 해결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후 이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기본 태도도 이 구두양해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학술적 해결'이 한국측에 불리한 까닭
'학술적 해결'이라는 어찌 보면 신사적이고 공정한 게임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또 학술적 해결을 거부하면 어딘가 자신감이 부족한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안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학술적 해결이라는 것이 한국 측에 얼마나 불리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자료 접근성의 문제다.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겠지만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사료(역사학 자료)의 학문이다. 아무리 직관적으로 훌륭한 통찰을 했다 해도 그것을 문서나 유물로 입증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역사학에서 어떤 주장을 하는 것은 법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밝히는 것과 같다. 자신의 주장이 아무리 옳고 정당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으면 재판에서 질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다. 고구려가 아무리 우리 역사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입증할 만한 사료가 없거나 혹은 그 사료가 중국의 수중에 있다면 우리로서는 고구려가 우리 역사임을 증명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옛 고구려 영토인 만주(요동)는 원래 주인인 한민족의 수중에서 벗어나 지금은 중국의 통치 하에 놓여 있다. 고구려사 문제에 관한 한 한국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중국이 자료를 장악하고 있는데 한국이 이런 상황에서 과연 자료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까?
중국 내에 있는 한국사 유적지에서 중국 관계자들이 한국인들의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얼마 전에 단체로 만주를 방문한 바 있는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도 사진 촬영의 어려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 이처럼 자료 접근성 면에서 한국은 중국에 뒤지고 있다.
자료 접근성에서 한국이 중국에 뒤진다면 학술 대결에서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인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고구려사 문제를 학술 대결로 끌고 간다면 자료를 많이 확보하고 있으며 또 얼마든지 자료를 새롭게 가공할 수도 있는 중국이 역사전쟁에서 승리할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한·중 역사분쟁에서는 솔로몬의 재판이 적용될 수 없다. 솔로몬처럼 현명한 제3자가 없기 때문에 한·중 역사분쟁에서는 어느 쪽이든지 간에 자료를 많이 확보한 쪽이 일차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 아기의 친엄마가 아닐지라도 아기에 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는 쪽이 아기의 법적인 엄마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사에 관해 별다른 자료도 확보하지 못한 한국측이 학술 대결에 선뜻 동의한 것은 스스로 게임을 포기한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2004년 8월 23일의 한국 정부는 장렬하게 전사하는 '멋진 패배자'가 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자신의 주장이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그것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으면 법정에 가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그런 경우에는 법적인 방법 외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최선이다. 마찬가지다. 학술 대결이 한국에 불리하다면 그 무대로 들어가지 않는 게 현명한 태도다.
둘째, 무기 대등성의 문제다. 지난 2004년에 양측은 학술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정부 차원의 대응을 삼가고 학자들에게 공을 넘겼다. 그러나 중국도 그렇게 했을까?
중국에서는 학계가 기본적으로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다. 더군다나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는 '변강사지연구중심'은 사회과학원 소속이고, 그 사회과학원은 국무원 소속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중국측의 대응이 순수한 학문적인 대응이 될 수 있을까?
엄밀히 말하면 한국 대표팀은 순수 학계로 구성된 반면, 중국 대표팀은 정부+학계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역사전쟁의 무기'라는 측면에서 중국이 한국보다 훨씬 더 우세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공정한 게임이 되려면 무기가 상호 대등해야 하는데 이처럼 대표팀 구성에서부터 우열이 확연히 갈린다면 이 게임이 과연 공정한 게임이 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순수한 학술 대결로 가면 중국측이 승리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왜냐하면 중국이 고구려사 자료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중국측은 사실상 정부 주도로 이 문제에 대처하고 있다. 그러니 중국측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게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을 본다면 한국 정부의 고구려사 해법이 얼마나 근시안적이고 졸속적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 강도는 흉기를 들고 있는데 경찰은 겨우 솜방망이만 들고 있는 꼴이다.
중국은 어차피 2004년 8월 23일의 약속을 어겼다. 중국은 이미 학술적 해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적 해결을 지향해 왔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도 '그 날의 언약'에 조금도 구애될 필요가 없다. 한국도 정치적 대응을 전개해야 한다. 정치적 대응을 통해 국민적 역량을 총동원해 중국의 고구려사 침탈야욕에 대응해야 한다.
몇 명 안 되는 고구려사 학자들을 징집하는 것보다는 열정과 애국심에 불타는 5천만 국민을 역사전쟁에 징집하는 게 승리의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이 될 것이다. 전쟁이 벌어졌는데, 학술서적만 뒤적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정부는 기존의 학술적 대응에 더해 정치적·외교적 대응을 추가하고, 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의 열기까지 동원하는 총력전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