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가 맨 먼저 발견한 수정동은 그가 꿈꾸고 경영하고자 했던 원림의 규모로는 아마 너무 작았는지도 모른다. 하나의 실험처와도 같이 조영하였던 수정동에서 고산은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 그곳은 병풍산을 사이에 두고 바로 넘어에 있었던 금쇄동이다. 금쇄동은 수정동에서 걸어서도 30분 가량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문학적인 공간으로 해석하여 본다면 보길도에서 지었던 <어부사시사>가 어촌을 배경으로 한 대표작이라면 산중인 임천(林泉)의 자연을 배경으로 한 것이 현산면 구시리 금쇄동에서 지었던 <산중신곡>과 <금쇄동기>라고 할 수 있다.
금쇄동은 우리가 책에서 배웠던 ‘오우가’가의 현장으로 고산은 금쇄동과 수정동 원림을 경영하며 산거생활의 흥취를 시로써 노래하였다. 금쇄동은 고산이 54세 되던 해에 금쇄석궤(金鎖錫櫃)를 얻는 꿈을 꾸고 나서 얻었다고 전해진다.
'귀신이 다듬고 하늘이 감춰온 이곳, 그 누가 알랴 선경인 줄을 깎아지르나니 신설굴이요 에워 두르나니 산과 바다로다. 뛰는 토끼 나는 가마귀 산봉우리 넘나들고 올라와 보니 전날밤의 꿈과 같음을 알겠구나. 옥황상제께서는 무슨 공으로 내게 석궤(錫櫃)를 주시는고'
이 한시는 고산이 금쇄동을 발견하고 지은 <초득금쇄동(初得金鎖洞)>이란 작품으로 금쇄동을 얻은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금쇄석궤’에 대한 이해를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금쇄동 정상부위에 작은 협곡을 따라 머리띠 형식으로 조성한 산성이다. 이 산의 정상부에 오르면 약 3만여평의 분지가 조성되어 있고 이 분지를 감싸고 약 1.5km 가량의 산성이 축조되어 있다.
이 산성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어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남아있는데 1656년 유형원이 만든 <동국여지지>에 이에 대한 기록이 나올 뿐이다. 유형원은 조선후기 실학자로 공재 윤두서와도 교유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져 지리지를 만들 당시 금쇄동에 대한 인식이 있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금쇄동은 해남현의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산세는 면곡(面曲)하고 험령(險嶺)을 넘으면 그 위에 고성지(古城址)가 있다. 인조 때 현사람 윤선도가 산의 높은 곳을 금쇄라고 이름지었다.'
고산은 이곳 금쇄동에 회심당, 불원요, 휘수정, 교의제 등을 짓고 연못을 파서 연꽃과 고기를 길렀다는 기록이 <고산연보>의 54세 때 기록에 나온다. 이곳 산성 안 금쇄동에는 고산이 기거한 것으로 보이는 회심당 터를 비롯하여 연지와 정자를 짓기 위해 석축을 쌓아 올린 건물터 등 당시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금쇄동 가는 길
금쇄동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만안마을에서 안내판을 따라 조그마한 언덕을 하나 넘으면 금쇄동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금쇄동은 외관상으로는 그리 높지도 웅장하지도, 바위절벽이 기묘한 산 같지도 않게 느껴진다. 그러나 산 아래로 가면 사뭇 그 느낌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병풍산 줄기를 따라 들어가다 보면 금쇄동 산 아래에 도착하는데 민가 한 채가 있고 금쇄동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있다. 금쇄동을 오르려면 이곳에서 작은 하천을 건너 소로를 따라 올라가야 한다.
고산은 그의 수필집인 <금쇄동기>에서 금쇄동에 관한 산수경관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금쇄동기>가 문학작품이라는 것을 인정 감안하더라도 금쇄동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여러 지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금쇄동을 오르면 그가 차례대로 명명한 불차, 하휴대, 기구대, 중휴대 등 20여개에 이르는 지명들이 나타나나는데, 고산이 명명한 지명들을 보면 그의 문학적 감성과 상상력이 돋보인다.
금쇄동기에 나오는 지명의 가장 첫 관문과도 같은 곳이 ‘불차(不差)’다. 고산은 금쇄동기에서 “그 모양이 심히 이상하여 큰 돌이 문 가운데로 가로질러 세인(世人)들의 수레를 막고 있는 것 같고, 금쇄동으로 가는 길이 틀림이 없어 위로 통할 수 있으니 ‘불차(不差)’라 이름 짓는”다 하였다.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기묘한 형상을 하고 있다. 이 기이한 모양의 바위를 그 첫 출입문으로 정한 것이다.
불차를 지나 올라가다 보면 숨이 찰 말한 곳에 잠시 쉬어 갈만한 넓직한 바위가 나온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잠시 쉬고자 했던 그의 의도가 느껴진다. 그래서 바위 하나에도 석대(石臺)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의 조영자연의 일부로 삼은 것이다.
가파른 산길을 멀리 산세 높고 웅장한 두륜산을 보며 오르다 보면 성의 바깥문(외성)과도 같이 느껴지는 허물어진 성벽의 구조물이 나타난다. 이 구조물은 작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쌓여 있는데 어찌 보면 축대를 쌓아올려 정자를 짓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바로 위가 산성이고 그 산성으로 들어가기 위한 출입구와도 같은 곳이다. 금쇄동 산성은 대체적으로 고산이 들어오기 전에 축조된 것으로 보여 고산이 산성을 이용하여 조영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산은 ‘금쇄석궤’를 얻는 꿈을 꾸고 금쇄동을 발견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곳은 자물쇠에 해당하는 곳처럼 느껴진다. 이곳에서 문을 열어야 비로소 금쇄동으로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의 경관으로 따지면 이곳 ‘휘수정’일대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앞에는 10m가 넘는 비폭이 떨어지고 난가대의 기묘한 바위, 멀리 대흥사가 있는 두륜산의 선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겨울에도 바람이 불지 않을 만큼 아늑한 지형이어서 고산은 이곳을 ‘휴식공간’이자 ‘문학적 영감처’로 만든다.
이곳에서 다시 좀더 오르면 허물어진 성벽이 나타나는데 성벽을 따라 가다보면 산성이 이곳에 입지해 있어야 할 이유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멀리 해남읍 시내가 내려다 보이고 바로 산 아래에 고대문화의 흔적들이 분포하는 해창만이 있어 그 지리적 중요성이 엿보이는 것이다. 금쇄동 산성에 대해서는 조선후기 유형원이 만든 <동국여지지>에서 밖에 그 기록을 찾을 수 없어 그 축조 연대와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려말 왜구들이 날뛰는 서남해의 어지러운 상황속에서 이를 방어하기 위한 성으로 쌓였다가 써먹지 못하고 방치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의 상황과 고산 정도의 정치적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라면 산성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산성이 있다는 것은 적어도 수십명의 사람이 살 수 있는 물과 주변 여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고산은 성안의 터나 유구를 그대로 이용 자신의 거처로 조영한 것이다. 그 당시에 금쇄동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였는지는 몰라도 고산이 터를 잡은 이래 이곳 일대는 지금도 해남윤씨가의 땅이다.
고산이 이곳 산성안에 조영한 연못과 정자, 집터 등은 이러한 입지적 여건이 갖추어져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이며, 산성 안에는 이러한 지형적 여건을 이용하여 만든 구조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경사진 곳에 축대를 쌓아올려 조영한 연못, 연못으로 물이 한꺼번에 흘러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보처럼 쌓아올린 돌무더기들, 가장 안쪽의 군대 지휘소와도 같은 성격으로 지어졌을법한 건물터가 남아있어 성으로 활용되었어도 천혜의 요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고산이 거처로 삼은 곳은 ‘월출암’ 바로 아래의 ‘회심당(會心堂)’이다. <금쇄동기>에 보면 월출암은 수백명의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넓이의 바위로 설명하고 있다. 아마도 달이 밝은 밤이면 고산은 이곳 월출암에 앉아 달구경을 하며 자신의 시심을 키우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곳 월출암에서는 병풍산의 낮은 줄기사이로 자신의 종택인 녹우당마을이 내려다 보여 고산의 선견지명을 느끼게 한다. 월출암에서 내려다 보이는 본가 연동은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월출암에서 깃발이나 연기를 통해 본가와 연락을 했다 한다.
고산은 <금쇄동기>에서 “북쪽 창문을 열어 제치면 고향 산(덕음산)이 눈앞에 들어오고 친척들의 밥 짓는 연기가 똑똑히 보이니 비록 가사(家事)를 잊고 궁벽한 오지에서 어른을 공경하는 상제(桑梯)의 경(敬)을 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문소동에 잡은 고산 묘
고산은 <금쇄동기>에서 수정산의 거처를 가려면 5리가 못되고 문소산(聞簫山)의 거쳐를 가자면 1리도 못되니 이는 1환(丸)의 자연이요 천년의 비경이라며 이 세 곳을 스스로 가까운 거리의 명구승지로 생각한다고 자술(自述)하고 있는데, 고산이 시가생활의 주된 무대로 삼은 수정동, 금쇄동, 문소동 중에서 고산의 묘가 있는 곳이 문소동이다.
문소동은 민가 한 채가 있는 곳에서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데, 현재 고산 제각과 묘소가 있다. 이곳에는 커다란 백일홍 나무 한 그루가 묘와 제각으로 가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고산은 그가 죽기 전에 묻힐 묘 자리를 금쇄동에 정한다. 그가 풍수에도 해박한 사람이었던 것을 보면 죽어서까지 영화를 바라는 옛사람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잡은 묘 터는 당시 유명한 지관이었던 이의신이 잡아놓은 터였다고 전해 온다.
이의신은 윤선도와 인척관계였다고 하는데 풍수지리에 밝은 이의신은 묘 자리로 쓰기위해 나귀를 타고 이곳을 열심히 왕래했다. 그런데 이를 안 고산이 하루는 따라가 보니 과연 명당자리였다. 고산은 이 묘를 차지하기 위해 묘 자리에 말뚝을 박고 물을 부어 묘 자리를 포기하도록 꾀를 써 차지했다는 이야기다.
고산 윤선도의 풍수에 대해 극찬한 사람은 정조 임금이었다. 고산은 효종이 승하하자 좌의정 심지원의 추천으로 왕릉 선정에 참여한다. 그는 여러 곳을 답사하고 난 뒤 수원 땅을 최고의 길지로 추천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송시열, 송준길 등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훗날 정조는 고산이 추천한 곳의 진가를 알아보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는데 그곳이 바로 수원 옆 화성의 융릉(隆陵)이다.
고산의 풍수는 이의신(李懿信)과의 만남을 통해서 형성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의신은 1600년 선조임금 어부인 의인왕후 박씨가 세상을 떴을 때 왕릉 선정에 참여하면서 선조에게 인정받았으며, 광해군 때는 경기도 파주 교하로 도읍지를 옮기자는 ‘교하천도론’을 주장해 몇 년 동안 조정에서 논란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고산이 이 아득한 산중에 은둔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자신만의 풍류적 생활이나 명리를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정치적으로 소외된 자신의 처지를 이 자연 속에서 도피하고자 하였던 것일까, 당시 거부가 아니면 조성하기 어려운 금쇄동에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것을 보면 기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고산이 조영한 금쇄동에 대해서는 오늘의 사람들도 다양한 생각을 갖게 한다. 금쇄동을 조영하기 위해 얼마나 노역을 시키고 아랫사람들을 못살게 굴었을까 에서부터 고산은 자연을 경영할 줄 알았던 빼어난 조영감각을 지녔던 사람이다. 또는 그의 문학적 상상력과 어휘력이 감탄스럽다 까지 그에 대한 평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의 해석을 갖게 한다.
고산은 금쇄동기의 가장 끝부분에서 금쇄동을 조성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내가 휘수(揮水)와 회심(會心)을 경영한 것은 배고프고 목마른 자가 음식을 생각함과 같음인데, 그 시절에 마침 크게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이 굶주림에 허덕이므로 공사(工事)할 식량을 마련할 계책이 없어서 재산을 팔아 인부 수인을 사서 이 일을 착공하였으니 천석(泉石)은 역시 마음속에 일일뿐만 아니라 재정(財政)이 있어야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물음에 대한 해답 같은 자기고백을 금쇄동기의 마지막으로 대신한다.
“대체로 나의 산수(山水)를 사랑하는 버릇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반듯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요, 나 또한 스스로 비웃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옛 사람이 이르기를 ‘고기가 없으면 사람을 여의게 하고, 음악이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고 하였으니, 재산은 비유컨대 고기(肉)이고, 천석(泉石)을 비유컨대 음악과 같다. 나의 취하고 버림이 진실로 이러한 뜻에 있으니 후세의 군자들이 반듯이 이를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