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한국에 왔던 크리스토퍼 힐 6자회담 미국 수석대표가 12일 인천공항을 통해 떠났다.
1박 2일간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그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유엔 결의안에 따른 대북 제재를 구체적으로 이행해야 하며 여기에 관련국들이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메시지는 흡사 '최후통첩'을 연상하게 했다.
다자회동 제안한 미국, 뻔히 보이는 속내
<연합뉴스>에 따르면 그는 12일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하기 전 "유엔의 모든 회원국들이 안보리 결의(1695호)를 이행해야 하며 이렇게 되도록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9·19 성명 이행을 원치 않는 게 문제"라며 "(유엔 회원국들이) 결의를 무시하거나 제스처 정도로 취급하는 것은 '유엔이 중요하지 않다'는 식의 비난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힐 차관보는 북한의 불법행동에 대해 "미국은 소위 방어적 조치라고 일컫는 행동을 취하고 있다"며 이같은 미 당국의 조치는 "법집행의 문제"라고 말했다.
이날 일부 언론은 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미국은 북한의 핵폐기 의지를 확인하기 위해 여러가지 제안을 했지만 북한이 반응을 보이지 않음에 따라 '더 이상 설득노력은 없다'는 최종 판단에 이르렀다는 입장을 우리를 포함한 관련국들에게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정부 소식통은 "앞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 제재 움직임이 가시화될 것으로 보인다"며 "힐 차관보가 5일부터 10일까지 중국에 체류할 때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에게 만날 것을 제의했으나 북한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같은 보도에 대해 외교부 당국자는 "미국이 더 이상 북한을 설득 노력을 포기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며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른 제재 이행의 구체적 시기와 내용은 각국이 판단할 일로 그것이 대화 노력을 포기하는 것으로 보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가 사실상 북한과의 대화 노력을 포기한 것으로 해석될 만한 여지는 크다.
미국은 이달 중순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총회를 계기로 지난 7월 아세안 지역안보포럼(ARF)에서의 '10개국 회동'과 유사한 다자회동을 제의한 상태다.
지난 7월 10개국 회동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 및 유엔의 대북 제재 결의안 직후 이뤄졌다. 당시 한국과 중국의 설득에도 북한의 백남순 외무상은 끝내 참석을 거부했다. 자연스럽게 '국제사회' 대 '북한'의 대결구도가 만들어졌고, 북한의 고립감은 더욱 더 부각됐다.
현재 북한은 '제재의 모자를 쓰고는 6자 회담에 복귀할 수 없다'며 금융제재 철회 전에는 어떤 협상에도 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번에 유엔에서 다자 회동이 열린다고 해도 북한이 참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시 한 번 '국제사회' 대 '북한'의 대립구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미국이 다자회동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 자체가 북한을 더욱 더 궁지에 몰기 위한 것임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협상을 거부하는 것은 북한이며 따라서 이제 제재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견해에 대해 외교부 당국자는 "다자회담이 6자회담 재개에 도움이 된다면 형식에 관계없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며 "단 지난 7월 다자회동 이후 특별히 달라진 것도 없고, 과연 한다고 해도 어떤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회담 참가국 수하고 생산성이 비례한다고 보기 힘들다, 어떤 면에서는 반비례하는 측면도 있다"며 "6자회담 틀을 살리고 가동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당국자도 다자회동 개최 자체에 대해 반대하지는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6자회담처럼 되지 말란 법 있나
결국 6자회담 참가국 가운데 다자회동에 반대하는 나라는 중국과 러시아, 특히 중국일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유엔 결의안에 찬성하고 7월 다자회동에 참석함으로써 한 때 북한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는 인상을 줬다. 그러나 최근 중국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초청한 것으로 알려지는 등 북한을 다독거리는 상황이다.
힐 차관보가 5~10일 중국 방문 때 제재 동참을 요구했으나 중국은 난색을 표하면서 사실상 거부했다. 이런 중국이 이번 유엔에서 열리는 다자회동에 참석할 지 현재로서는 판단하기 힘들다.
지난 2003년 6자회담이 시작될 때 이미 이 회담의 유용성에 대해 많은 의문이 있었다. 6자회담이라는 틀은 결국 5 대 1의 구도로 미국이 북한을 고립시키기 위한 것이며, '대화는 하되 협상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의 실현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6자 회담 참가국 중 북한을 뺀 다른 나라들 사이에도 각종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하고 있다. 6자 회담도 이러한데 더 많은 나라가 참여하는 10자회동 등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 미국의 다자회담 강력 추진은 그들 역시 북한과 더 이상 협상할 뜻이 없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