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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 아직 초저녁임에도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는 깊은 잠에 취해 계셨습니다.
"주무셨어요?"
"나이를 묵었는가 벌초 좀 허고 왔드만은 사람이 기운이 하나도 없이 비글비글허니 잠만 쏟아진다."
"저녁은요?"
"묵었다."
"그럼 주무세요. 내일 또 전화드릴께요."
얼마나 피곤하셨던지 엄마는 대답도 못하신 채 수화기를 내려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생전 가야 볼 일 없는 달력을 뒤적거려 보았습니다. 열대야로 밤잠을 설치던 게 엊그제 같건만 어느새 추석이 이십여일 앞으로 다가와 있더군요. 하루종일 기름냄새 맡으며 음식준비하고, 꼭두새벽에 일어나 차롓상 차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어깨가 아파오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 너머로 어릴 때 추석날이 아련이 떠올랐습니다. 친구들에게는 하나같이 새 옷을 얻어입고, 돈 벌러 나간 삼촌과 고모를 기다리던 추석이 올 사람도, 반길 사람도 하나 없는 저에게도 퍽이나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추석이면 일년 가야 두어번 구경하기도 힘든 고기를 실컷 먹어볼 수 있었습니다. 하도 흔해서 개도 안 물어가는 것이 생선인 섬마을이니 귀할 것도 없이 삼시 세때 먹어대는 생선보다야 씹는 맛도, 뜯는 맛도 있는 육고기가 더 맛나고 귀하게 느껴질 수밖예요.
손에 복이 붙어서 가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길러내던 엄마 덕에 명절때면 언제나 저희집 돼지막은 사람들의 환호성으로 메워졌습니다.
"등허리 반질반질허고, 뒷다리 트실헌 것 좀 보소."
커다란 가마솥 가득 물을 끓이고, 털을 벗기기 위해 전복껍데기를 들고 모여드는 동네 아이들은 아직 근수도 재지 않은 돼지맛을 상상하느라 쩝쩝 입맛을 다시고 있었습니다.
묵은 김치 숭숭 썰고, 부추를 넣고 끓인 국밥 한 그릇이면 돼지털을 벗기느라 뻐근해진 어린 팔을 위로하기에도 충분한 보상이었습니다. 이렇듯 더덕더덕 피어 있는 마른버짐을 싹 걷어갈만큼 기름진 돼지국밥도 좋았지만 제가 진짜로 추석을 기다리는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모두가 누리는 추석이지만 남들은 알지 못하는 추석의 맛을 저는 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곱게 차려입은 하얀 모시저고리에 은비녀를 꽂아 올린 애기주먹만한 머리. 등에 업은 아이의 콧물이 훌쩍훌쩍 떨어져 등허리가 젖어도 그저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시기만 하시던 할머니의 기일이기도 했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손녀를 지독히도 예뻐하시던 할머니의 기일이면 당연히 슬퍼해야 마땅하겠지만 그때는 자랑할 거라곤 성질머리 고약한 오빠뿐인 제게 남들보다 두 배나 음식을 장만해야 하는 추석은 엄마의 등허리야 골병이 들든지 말든지 그저 수북히 해내는 음식들이 마냥 오지고 좋기만 했습니다.
이쑤시개에 의지한 채 위풍당당한 자태로 제삿상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있는 닭도, 꽃모양으로 삶아놓은 계란도, 무지개 모양의 젤리도, 치렁치렁 단가루를 휘날리던 약과도 동네에서 저 혼자만 먹어볼 수가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향을 피우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비통함을 이해할 리도 없었거니와 '먹을 복 하나는 타고난 양반이라 죽어서도 제삿밥 하나는 안 굶고 챙겨드신다'며 타박인지 부러움인지 모를 한숨을 토해내던 엄마의 마음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많이 먹을 수 있는 추석이 좋았을 뿐이었지요.
그땐 추석이 일년에 한번뿐인 것이 썰물에 떠밀려간 고무신 한짝보다 더 큰 아쉬움이었습니다. 매일매일이 추석같고, 또 매일매일이 추석이었으면 하고 빌기도 했었으니까요.
그런데 일주일이 멀다하고 먹는 고기반찬에, 뉘집 할 것 없이 먹는 허연 쌀밥, 그리고 돈만 들고 나가면 사시사철 사서 먹을 수 있는 과일과 차롓상 대신 비자를 들고 여행을 떠나버리는 사람들로 추석의 의미가 많이 사라진 지금에도 추석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마음은 예전과 다를 게 없나 봅니다.
"엄마 추석이 언제야? 빨리 추석이 왔으면 좋겠다."
며칠 전에 저렴하게 사준 한복이 어제 도착을 했고, 포장을 뜯자마자 아이는 한복을 입고 뱅돌이를 하며 추석이 빨리왔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릅니다. 추석이 아니어도 언제든지 새 옷과 새 신발과, 새 한복을 입을 수 있는데도 말이에요.
고기와, 쌀밥과, 할머니의 제사와는 다른 예쁘게 한복을 입은 모습을 사촌언니와 큰 아버지들께 자랑하고픈 마음으로 기다리는 추석이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 같기만 하라는 추석이 빨리 오라고 저 역시 빌어줬습니다.
추석이 되면 누구나 저처럼 한번은 고향을 생각하고, 부모님을 생각하며 힘들었던 날들로부터 잠시라도 해방될 수 있을 테니까요.